할머니 방에서 발견한 할머니의 자서전
추석 특집
어느 명절에 있었던 일입니다.
생선 굽는 냄새를 맡으며 그다지 넓지 않은 할머니 댁을 구경하기 시작했습니다. 냉장고를 열어보는 습관처럼 따분한 기대감으로 두리번거렸습니다. 그때 할머니 방 침대 옆 탁자에서 신기한 물건을 발견했습니다. 작은 책자였습니다.
마분지에 색종이를 오려 붙이고, 글을 직접 적어서 만든 것이었습니다. 책자의 제목은 ‘자랑스러운 나의 삶’이었습니다.
자랑스러운 나의 삶
<자랑스러운 나의 삶>은 배두순씨의 자서전이었습니다. 그림일기 형식이었습니다. 풀로 사진이나 그림을 붙였고, 그림 아래에 짧은 글을 적어두셨습니다. 쪽수는 스무 쪽 정도였습니다. 내용은 할머니의 어린 시절부터 결혼해서 지금까지 살아온 이야기였습니다.
할머니가 할아버지와 어떻게 만나 결혼하셨는지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두 분은 동네 이웃의 소개로 알게 됐습니다. 당시 할아버지는 군에 입대하기 직전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혼하자마자 할머니는 고무신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 상황이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할머니에게 결혼은 선택의 문제는 아니었고, 할아버지와 결혼하게 됐습니다.
할아버지는 동네 청년들과 잘 어울리는 분이었지만 돈 버는 일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할머니가 다양한 일을 하면서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고 합니다. 이 대목을 읽고 할머니께 “할아버지는 왜 돈을 안 벌어오셨던 거예요? 물어보면 뭐라고 하시던가요?”라고 여쭤봤는데 “그냥 귀찮고 싫어서겠지. 물어본 적은 없어”라고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할머니의 두 아들이 중학생, 고등학생이 될 때쯤에야 할아버지는 아파트 경비원으로 취직해 꾸준히 돈을 버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부담이 덜어져 기뻤다고 쓰여있었습니다. 할아버지 때문에 힘들긴 했지만 먼저 세상을 떠서 서운하고, 아쉽고, 슬펐고, 그립다는 내용도 적혀있었습니다.
대부분 제가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였습니다. 늘 할머니는 제가 어떻게 사는지를 물어보셨지만, 저는 할머니가 어떻게 살아오셨는지 여쭤본 적이 없었거든요. 지난 30여 년 동안 말입니다.
노인의 삶에는 음표가 없다
배두순 씨는 복지관의 ‘자서전 쓰기’ 프로그램을 수강하면서 자서전을 만들었습니다. 복지사 선생님의 안내와 도움에 따라 몇 주에 걸쳐서 친구들과 함께 만드셨다고 합니다. 재미있으셨냐고 여쭤봤더니 무척 재미있고 뜻깊었다고 합니다. 이런 멋진 것이 나올 줄을 몰랐다면서요.
복지관에서 이런 좋은 프로그램을 운영한다는 것이 저는 감격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들을 기회가 얼마나 자주 있는지 여쭤봤습니다. 할머니는 잠시 생각하시더니 지금까지 한 번밖에 해보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음표가 많아졌습니다. 넷플릭스, 골프, 서핑, 바디 프로필, 필라테스, 와인 클래스, 해외 여행 등등. 그런데 대부분 젊은 사람들을 위한 즐길 거리입니다. 노인의 삶에는 ‘자서전 쓰기’와 같은 경쾌한 음표가 귀합니다. 배두순 씨의 취미는 친구와 산책하기, TV 드라마 보기입니다. 이것들도 괜찮은 취미지만, 좀 더 재미있는 것들이 많아져도 좋겠습니다.
예를 들면 ‘자서전 쓰기’ 같은 맞춤형 활동이 다양하게 개발돼서 한 달에 한 번쯤은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지만 노인은 소득이 적고, 젊은이와 다른 특성을 가진 소비자입니다. 그래서 시장에서 노인을 위한 엔터테인먼트가 많이 나오기 어렵습니다. 사회에 필요하지만 기업이 못 만드는 거라면 공공재를 만드는 정부가 공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더 재미있는 일이 할머니의 삶에 많아져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큰 고생을 겪은 지금의 노인 세대를 위해 필요한 일이고, 언젠가 노년이 될 모두를 위해 필요한 노후대비이기도 합니다. 저는 재미있게 지내는 노인이 되고 싶거든요. 여러분도 같은 생각 아닌가요?
연휴가 무려 이틀이나 남았습니다. 즐거운 추석 명절 보내셔요!
이대호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