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준비한 출마를 포기한 이야기를 듣다

선배 정치인 이야기

오래 준비한 출마를 포기한 이야기를 듣다

※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의 스포일러가 포함돼있습니다

며칠 전 만난 중년 당원 최 선생님은 지방의원 출마를 오래 준비하셨다고 합니다. 지난 선거에서는 아쉽게 고배를 마셨고요. 그런데 내년 지방선거에 출마하지 않기로 최근 결정하셨다고 합니다.

최 선생님은 다음 선거에 출마하시면 당선 가능성이 높은 상황입니다. 역량과 조직 기반을 두루 갖추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사회복지 분야에서 오래 일하셔서 복지 현장에 대한 전문성이 있는 분입니다. 정당 활동 경력도 길고 오래 선거를 준비하셔서 조직도 탄탄합니다.

그런데 왜 출마를 포기하게 됐냐고요?

최 선생님이 출마하지 않기로 한 건 아들뻘 되는 후배 J 때문입니다. 최근 최 선생님은 제 또래인 J가 같은 지역구에서 출마를 결심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J는 오랫동안 최 선생님을 따랐던 아끼는 친구였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최 선생님은 ‘내가 나가지 말고, 지금까지 쌓아 온 기반을 J를 위해서 써야겠구나’하는 생각이 드셨다고 합니다.

J를 올바른 생각을 갖고 있고, 앞으로 크게 성장할 수 있는 후배라고 생각하신답니다. 게다가 국민의힘이 이준석 대표를 당대표로 선출하는 것을 보면서 많은 시민이 세대교체를 원하고 있다고 생각하시게 됐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오래 준비한 것은 아깝지만 지역과 정당의 미래를 생각하면 자신보다는 젊은 후배가 공직에 진출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셨답니다.

이번만 내가 하고 물려주겠다

최 선생님의 이야기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선배 정치인이 후배 정치인에게 기회를 양보하고 조력자가 되기로 한 사례를 처음 봤기 때문입니다. 반대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출마하려는 후배에게 “이번까지만 내가 할 테니까 다음에 출마하라”고 이야기한 뒤 끝내 약속을 지키지 않은 선배 정치인 이야기는 정말 흔합니다.

그래서 저는 세대교체를 ‘공성전’으로 생각했습니다. 깃발을 기꺼이 내주는 성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깃발을 차지하고 싶다면 성을 무너뜨릴 힘을 가져야 합니다. 능력을 갖추고 세력을 모아서 성을 공격하고, 끝내 무너뜨려 깃발을 빼앗아야 하는 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세대교체의 우월 전략은 ‘더 잘나고 유능한 내가 되기’입니다.
그런데 최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공성전’이 아니라 ‘이어달리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어달리기에서는 팀의 승리를 위해 더 잘 달릴 수 있는 사람이 바톤을 넘겨받아야 합니다. 물론 제대로 달리지 못하면서 바톤을 안 넘겨주는 주자도 있지만, 최 선생님처럼 잘 달릴 수 있는데도 바톤을 넘겨주려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렇다면 아군과 적군으로만 구분한 공성전 전략은 최선이 아닙니다. 선배들이 어떻게 바톤을 넘겨주고 싶게끔 할지 고민해야 합니다. 선배 세대의 양보와 조력을 이끌어낼 수 있는 확장을 기획해 더 큰 팀을 만들어야 합니다. J가 아무리 잘났다고 한들 최 선생님의 조력을 받으면 혼자서는 해낼 수 없는 많은 일을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블레이드 러너 2049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의 주인공 K는 꿈으로 계시를 받습니다. 계시의 내용은 K가 세상을 구원할 영웅적 존재라는 내용입니다. K는 계시를 쫓아 모험을 하지만, 계시가 가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영웅적 존재는 따로 있었습니다. K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영웅이 완수할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K는 진실 앞에서 고뇌합니다. 계시가 가짜였다는 실망, 진짜 영웅에게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 그럼에도 불구하고 옳은 일을 해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정의감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블레이드 러너 2049>의 K처럼 최 선생님은 멈춰 서서 성찰하셨습니다. ‘내가 공공에 가장 기여할 수 있는 사람이 맞나?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 혹시 양보는 아닐까?’하고 고민하셨습니다. 게다가 이 고민을 다선 의원이 되신 후에 하신 것도 아닙니다. 오래 준비한 끝에 거둘 첫 번째 결실을 앞두고 결정하셨습니다. 위대한 정치인이 멀리 있지 않았습니다.


저도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나보다 더 나은 대안은 없는지, 공공에 가장 이익이 되는 최선의 선택이 무엇인지 말입니다. 그리고 기억해야 합니다. 슬프게도 양보의 골든 타임은 ‘하고 싶은 거 다 해보고 나서’가 아니라 그것보다 일찍 온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대호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