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몇 단지 살아?
구미동 동네산책
※ 하루 늦게 편지를 보내게 되어 죄송합니다. 편지는 매주 화요일, 금요일에 보내고 있습니다. 앞으로 약속을 더 성실히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기다린 분이 계신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사무실에만 있기에는 시간이 아까워요!”
지난번 회의 때였습니다. 가장 멀리 사는 동료 Y가 성남까지 왔는데 사무실에만 있으려니 아깝다고 했습니다. 나가서 사람도 만나고 동네 구경도 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동의합니다. 보고서를 읽고 회의하는 것만으로는 정치를 잘할 수 없습니다.
어디를 보여드리면 좋을까 고민한 끝에 제 ‘고향’부터 소개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태어나지 않았지만 고향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보낸 청소년기의 경험은 제 가치관과 정치적 입장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습니다. 그것을 동료들에게 충분히 설명하고 싶어졌습니다.
너는 몇 단지 살아?
초등학교 6학년 때 이사 와서 처음 이 질문을 받았을 때 조금 난감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사는 곳은 아파트가 아니어서 단지 번호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집은 빌라라서 단지가 없어” 같이 대답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몇 단지에 사느냐?’는 질문이 싫었습니다. 세상 물정 잘 몰랐지만, 아파트에 살지 않는 소수자라는 점이 창피했습니다. 빌라나 오피스텔, 임대아파트에서 사는 것이 특별히 불편하지는 않았습니다. 누가 놀리거나 괴롭혔던 것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저와 같은 아이들은 몇몇 질문에 당당할 수 없습니다. ‘어디 살아?’, ‘너네 집 놀러 가도 돼?’ 그래서 묘하게 주눅 들어 있었습니다.
휴먼시아 거지
청소년기를 지나면서는 위 문제를 고민하지 않게 됐습니다. 대학에 진학하고 군 생활을 해보니 세상은 넓고 삶의 방식은 다양했습니다. ‘몇 단지에 살아?’ 같은 질문은 유년기의 세계에서나 크고 중요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디에 사느냐?’는 질문은 여전히 누군가에 큰 고민거리입니다. 한때 ‘휴먼시아 거지’라는 말이 회자됐습니다. LH가 짓는 공공임대주택은 ‘휴먼시아’라는 브랜드를 씁니다. 휴먼시아 임대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을 ‘휴먼시아 거지’라고 놀리는 일이 있다는 겁니다.
어떤 부모는 자신의 자녀가 학교에서 주눅 들거나 차별을 당할까 봐 걱정합니다. 아이가 학교에 진학하면 임대아파트에서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요. 지금 사는 임대아파트, 빌라에 계속 사는 것이 경제적이고 합리적인 결정이더라도 말입니다. 아파트 선호, 비아파트 거주에 대한 인식은 사람들의 합리적인 결정을 방해합니다.
힌트: 문제는 품질 보다 인식이다
우리 집이 아파트가 아니라서 자녀가 주눅 들거나 차별을 겪을까 봐 걱정하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걱정 안 해도 되는 사회에서 살고 싶습니다. 안 그래도 집 구하기가 어렵습니다. 조건에 맞는 집을 찾았는데, 아이가 주눅 들까 봐 피하는 일 줄이고 싶습니다. 아이들이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주눅 들어 자라는 일도 없애고 싶습니다. 아직 방법은 정확히 모르겠지만요.
동료 Y에게 제가 다녔던 초등학교와 살았던 집들을 보여드리면서 위의 이야기를 들려드렸습니다. 비수도권에서 자란 Y는 의아하다고 했습니다. 자기 눈에 성남시는 굉장히 좋은 인프라를 갖추고 있고, 아파트에 살든 그렇지 않든 간에 매우 좋은 환경인 것 같다고 했습니다. 이런 좋은 환경에서 열등감을 느끼며 자란다니, 설명을 들으니 이해는 되지만 참 신기하다고요.
Y의 말씀을 듣고 보니 방법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절대적인 주택 품질의 문제라면 막대한 돈을 들여 도시를 고쳐야 해결됩니다. 물론 그렇게 해결해야 하는 곳들도 곳곳에 있습니다. 그런데 품질 자체는 지금도 문제가 없는 곳이라면, 다른 접근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을 설득하면 됩니다. 그게 정치인이 할 일 아니겠어요?
좋은 주말 보내셔요!
이대호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