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피해호소인이 아닙니다
성폭력 피해자 보호막을 강화해야 하는 이유
추적추적 비가 오고 으슬으슬 추운 화요일입니다.
갑자기 기온이 떨어졌는데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하세요!
지난주에 <나는 피해호소인이 아닙니다>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서울시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가 성폭력 사건 이후 자신이 겪은 고통에 대해 자세하게 쓴 책입니다. 읽으면서 정말 다양한 생각과 감정이 들었지만, 가장 하고 싶은 이야기 하나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강력한 사설 보호막 ‘가족’
저자 김잔디(가명)는 사건 이후 끊임없이 강한 자살 충동에 시달렸습니다. 여러 심각한 고통이 중첩되며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성폭력 피해가 남긴 상처, 가해자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 제 3자들의 비난과 신상 유포,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피해자의 피해 사실을 부정하거나 축소하려는 데 따른 억울함 등이 김잔디를 고통스럽게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김잔디는 살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남은 인생이 고통뿐이라면 삶의 의미를 찾기 어려운 것이 당연합니다. 그렇지만 김잔디는 죽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김잔디를 반드시 지켜야 하는 사람들이 곁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김잔디의 가족과 여러 여성단체로 구성된 피해자 지원단체가 그들입니다.
엄마는 사건 이후로부터 최근까지 24시간 김잔디의 곁을 지켰습니다. 그의 동생은 매일매일 인터넷에서 김잔디에 대한 비방, 신상 유포 글을 찾아 신고하고 삭제했습니다. 아빠는 퇴직금을 헐어 법률 비용을 댔습니다. 전문적인 조력이 필요할 때는 언제나 피해자 지원단체가 김잔디를 지켰습니다. 가족과 지원단체가 시멘트처럼 빽빽하고 단단한 보호막이 되어 김잔디가 삶을 포기하지 않도록 붙잡았습니다.
마침내 김잔디는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복직’을 최근 해냈습니다. 그토록 바라던 ‘평범한 일상’의 첫 단추를 끼웠습니다.
사설 보호 시스템의 한계
저는 책을 읽으며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김잔디에게 24시간 지켜줄 수 있는 가족과 전문성으로 무장한 피해자 지원단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김잔디는 정말로 정말로 죽고 싶었고 수많은 위기를 지났습니다. 그런데 모두에게 이런 전폭적인 지지와 위로를 보내줄 수 있는 가족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피해자 지원단체의 여력도 한계가 있습니다.
가족과 피해자 지원단체는 공적 보호막이 아닙니다. 즉,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보장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폭력, 직장 내 괴롭힘은 든든한 가족을 가진 사람에게만 발생하지 않습니다. 폭력 피해는 모두가 겪을 수 있다면 보호막도 모두에게 주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공적 보호막이 현재 어떠하고, 부족한 부분은 무엇이고, 성남시장은 어떻게 부족한 부분을 채워야 하는지 이번 선거에서 이야기할 것입니다.
귀하를 위한 일입니다
이 책에는 김잔디가 느꼈던 깊은 절망과 우울, 분노, 죽음에 대한 충동이 자세하게 쓰여 있지만, 김잔디는 제게 늘 괜찮은 척을 했습니다. 종종 안부를 묻는 제게 힘들지만 괜찮다, 신경 써줘서 고맙다고 말할 뿐 죽고 싶을 만큼 힘들고 괴롭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대화는 대체로 점잖았고, 마지막에는 희망을 이야기했습니다. “괜찮아지겠지”라는 식으로요.
그렇지만 사실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극심한 우울과 고통, 분노로 힘들어하고 있고, 희망을 거의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는 걸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구태여 묻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힘든지 솔직하게 이야기해도 괜찮다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비겁하게도 김잔디가 제게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냈을 때 그것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건 이후 한참 동안 늘 조마조마했습니다. 김잔디가 극단적인 선택을 할까 두려웠습니다.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저도 이전처럼은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좋아했던 직장 상사의 비극적 죽음을 경험하면서 가까운 사람의 슬픈 죽음이 얼마나 큰 상처가 되는 일인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피해자를 돕는 공적 보호막을 두텁게 만들어야 합니다. 보호막이 얕을 때 피해자는 어려운 상황에 놓이고, 주변 사람은 비겁자가 되기 쉽고, 우리는 소중한 사람을 잃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함께 소중한 사람들을 지킵시다.
마지막으로 정말 힘든 시간을 버텨줘서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좀 더 도움이 되는 친구가 될게요.
존경하는 친구 김잔디에게 이대호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