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방어전 문제

의무방어전 문제 (1/3)

의무방어전 문제

구름 낀 덕분에 덥지 않은 하루였는데, 잘 보내셨어요?
오늘 하루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오늘부터 선거 치르면서 가장 크게 깨달은 바를 3회에 걸쳐 쓰려고 합니다. 3부작의 제목은 <의무방어전 문제>입니다. 이 이야기는 어느 늦은 밤, 성남시장 공약 제출 마감은 앞두고 진행됐던 마라톤 정책 회의 자리에서 시작합니다.

어쩔 수 없는 일

전략공천 이후 저는 배국환 캠프 정책실에 합류했습니다. 정책실의 첫 번째 과제는 주요 공약을 확정 짓고 선거공보물을 완성해 집집마다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각종 보고서와 전문가 의견을 취합해 주요 공약 정리 본을 만들었습니다. 초안이 완성되자 후보와 주요 의사결정자들이 참여한 마라톤 회의를 시작했습니다.

핵심 논점은 주거, 교통 공약이었습니다. 주거 공약은 주로 재개발, 재건축, 리모델링 활성화하겠다는 내용이고, 교통 공약은 지하철 연장, 역사 신설하겠다는 내용입니다. 관련 토론이 길어지는 가운데 저는 가슴이 갑갑해지고 짜증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지금 논의하는 주거, 교통 공약이 다 이행되면 집값이 지금보다 훨씬 오를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저처럼 소유한 주택이 없고, 물려받을 집도 없는 사람들은 점점 살기 힘들어질 것 같다’고 성남시장 선거 경험이 많은 분께 푸념했습니다. “어쩔 수 없어요. 의무방어전이라고 보시면 돼요. 누가 출마하든 해야 하는 것들이에요. 그런 공약들 안 내면 무조건 지게 되어있어요”라고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때 이 문제를 ‘의무방어전 문제’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의무방어전 문제

제가 정의한 의무방어전 문제란 ‘누가 성남시장 선거에 출마하든 경제적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공약을 낼 수밖에 없는 정치적 환경’을 의미합니다. 이 환경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 현재의 선거 지형에서 교통, 주거 관련 주요 요구를 ‘빠짐없이’ 공약하지 않으면 선거에서 패배합니다. 예를 들어 재건축 용적률 완화, 지하철 연장, 경전철(트램) 신설, 역사 신설 등입니다. 그래서 후보, 당에 관계없이 교통, 주거 공약은 같습니다. ‘의무방어전’입니다.

(2) 교통, 주거 관련 요구를 이행하면 주택, 부동산 가격이 상승합니다. 분당구 아파트 가격은 해당 아파트를 현재 이용하는 가치보다는 미래 재건축 가능성, 재건축 수익성에 의해 결정됩니다. 또 주변에 지하철이 생기면 주택 가격이 상승합니다.

출처: 2018 성남연보

(3) 모든 사람이 부동산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동산 가격이 상승하면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2015년 성남시 기준 ‘자기 소유 집에 사는 가구’ 비중은 40%입니다. 60%는 세입자입니다. 집값이 오르면 임대인과 세입자 간 경제력 격차는 커집니다.

물론 부동산 개발, 교통수단 확충에 따라 집 없는 성남시민들도 이익을 봅니다. 재개발이 이뤄지면 도시환경이 깔끔해집니다. 교통수단이 확충되면 더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산 격차가 커지는 데 따르는 불안과 맞바꿀 정도로 큰 이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실제 성남시장 공약 비교

배국환 후보 선거공보물
신상진 후보 선거공보물

순서대로 배국환 더불어민주당 후보, 신상진 국민의힘 후보(당선인) 공약집입니다. 지하철 연장, 지하철 역사 신설, 개발/재개발 관련 규제 완화 등의 공약이 일치합니다. 실제로는 개별 사안에 대해 다른 입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주민들이 강하게 요구하는 부동산, 교통 정책, 사업 중에 현실성, 타당성이 낮은 것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모두 ‘의무방어전’을 치르고 있습니다.


꼼꼼하게 읽으신 분은 이런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성남은 60%가 세입자인 도시인데, 집값이 오르는 공약을 빠짐없이 내지 않으면 선거에서 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러게 말입니다. 60%가 집을 안 갖고 있어서 집값이 올랐을 때 불평등이 심화된다면, 불평등을 완화하는 방향의 공약을 내야지 이길 수 있지 않겠어요?

다음 편지에서는 그 이유를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주 화요일까지 잘 지내고 계셔요!

하루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대호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