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증, 불안, 머쓱함 그리고 황홀감

그린벨트 프로젝트 (7)

짜증, 불안, 머쓱함 그리고 황홀감

짐작한 것보다 더 추운 하루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고민이 될 때는 더 따뜻한 것을 선택하세요!

어제 역사적인 결정을 내렸습니다. 제가 활동하는 그린벨트가 드디어 함께 해결해나갈 문제를 결정했습니다. 그린벨트 V2를 8월 초에 시작했으니 꼬박 두 달 걸렸습니다. 예상보다 어렵고 지난한 과정이었습니다. 어떤 점이 어려웠는지, 버텨서 어제 거둔 보상은 무엇인지 소개합니다.

두 달 동안 한 일

작년 연말에 결성했던 그린벨트 V1은 출마자 모임이었습니다. 최다 인원의 선거 완주라는 명확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선거가 끝난 후 ‘우리 뭐 같이 해보면 좋겠는데’하는 공감대가 남았습니다. 그때 운영팀의 선택지는 두 개였습니다. 첫째, 운영팀끼리 방향을 정한 후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 둘째는 우선 사람을 모은 뒤 함께 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린벨트 처음 만들 때는 첫째 방법을 택했습니다. 이번에는 둘째 방법으로 하기로 했습니다. 두 달간 3단계에 걸친 문제 결정 절차를 시작했습니다. (1) 각자 기획안 제출 (2) 기획안을 보고 관심사가 유사한 사람끼리 조 편성 (3) 조별로 토론해 조별 그린벨트 활동 계획안 도출 (4) 도출된 5개 조별 기획안을 투표에 부쳐 1개 선택 순서였습니다.

'결정'과 '하는'을 붙여쓰면 좋았을 2차 총회 포스터

거의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 수준이죠? 그리고 마침내, 어젯밤 열린 그린벨트 2차 총회에서 그린벨트가 앞으로 해결할 하나의 문제를 선택했습니다.

짜증, 불안, 머쓱함

공론장 과정에서 느낀 기쁨에 관해서는 두 번이나 편지로 썼습니다. 이번에는 그간 겪은 불행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두 달 간 공론장을 운영하면서 종종 짜증 났고, 가끔 불안했고, 점점 머쓱했습니다.

가끔 차질이 생길 때 짜증이 났습니다. 그린벨트는 급여를 받고 일하는 회사 조직이 아닙니다. 구성원들에게 그린벨트는 사이드 프로젝트의 하나입니다. 바쁜 일, 급한 일 생기면 우선순위에서 내려가기 쉽습니다. 그러다 보면 미뤄지거나 무산되는 과업이 종종 생깁니다. 제가 하기로 한 일을 안 할 때도 있고요. 그러다 보면 차질이 생기고, 그럴 때마다 짜증이 났습니다.

점점 단촐해지고 있는 회의 참석 인원 (주륵...)

그린벨트 멤버들의 조직에 대한 관심도가 떨어지는 추세입니다. “지방선거 같은 뚜렷한 계기도 없는데 그린벨트 앞으로 잘할 수 있겠냐”는 질문을 초기에 많이 받았는데요. 정말로 그렇습니다. 자극적인 목표 없이, 함께 목표를 정하는 지루한 일을 함께하니까 관심도가 뚝 떨어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불안한 마음이 듭니다. 재미도 보람도 느끼지 못하고 다들 떠나면 공론장도 의미가 없으니까요.

사실 짜증과 불안은 큰 문제가 아닙니다. 가끔 드는 감정이니까요. 그런데 머쓱한 건 좀 어려웠습니다. 그린벨트는 당의 공식 조직도 아니고, 유력 정치인이 기획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께까지는 목적도 불분명했고, 공론장으로 목표를 설정하는 방식도 특이합니다. 이 모든 것이 저를 머쓱하게 했습니다. 스스로가 ‘이상한 사람’처럼 느껴지고 왠지 숨고 싶고 그런 감정 말입니다. 구성원의 참여율이 떨어지고 업무상의 차질이 늘어나며 점점 머쓱해졌습니다.

극댓값 (local maximum point)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2차 총회를 시작했습니다. 그린벨트가 제정한 규칙에 따르면 구성원 절반인 33명이 와야 총회가 성사됩니다. 안 될 수도 있을 거 같았습니다. 성사되지 않았을 때의 플랜 B도 없어 걱정됐습니다. 그런데 기우였습니다. 정족수보다 많은 40여 명의 구성원이 들어왔거든요. 그리고 채팅창을 인사와 농담, 격려로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황홀했던 순간

결국 계획대로 됐습니다. 60여 명의 구성원이 각자 의견을 내고, 팀별로 토론하고, 합의된 기획안을 만들고, 그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민주적 의사결정에 성공해낸 것입니다. 투표 결과 그린벨트는 ‘민주적 공론장 활성화’를 목표로 삼기로 했습니다. 지난 편지에서 소개한 서커스 유랑단 아이디어입니다. 2차 세계대전 종식에 합의하는 UN 총회에 참석한 것같은 느낌이랄까요. 동료 지수님 표현은 이 느낌을 황홀함이라고 말했습니다.

어제밤은 극대값(local maximum point)이었습니다. 그 황홀함은 아마 당분간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물론 즐겁기도 하겠지만, 짜증과 불안, 머쓱함이 다시 찾아올 것입니다. 일이라는 것이 원래 그렇지 않아요? 사전에 보면 이따금 느끼는 큰 기쁨으로 꾸역꾸역 해나가는 것이라고 쓰여있던데요?


여러분, 힘내서 내일 다시 해보자고요!
아마 다음 극대값이 머지않았습니다!

며칠 뻗고 싶은 이대호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