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서 만난 김대중
제주도에서는 매년 ‘제주포럼’이 열립니다. 제주도와 외교부가 공동으로 개최하고, 해외 정상급 연사들이 참석하는 큰 행사입니다. 이번에 처음 가봤는데요. 사실 포럼보다는 회국수와 보말 칼국수를 먹고 싶어서 갔습니다. 그런데, 예상 밖의 깊은 고민을 하게 됩니다. 시계를 잠깐 돌려 2000년으로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2000년 6월 13일
대한민국 대통령 김대중은 평양에 방문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평양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정상회담을 했습니다. 세 차례의 회의를 거쳐 공동합의문을 작성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6월 15일에 발표된 것이 유명한 ‘615 공동선언’입니다. 남북 정상이 처음 만난 합의한 내용은 무엇이었을까요?
여섯 가지 내용이 담겼습니다. (1) 통일 문제는 자주적으로 해결하자 (2) 남한의 ‘연합제’안과 북한의 ‘낮은 단계 연방제’안의 공통점을 바탕으로 통일을 고민하자 (3) 이산가족 문제와 비전향장기수 문제를 풀자 (4) 경제, 문화, 체육 등 다양한 분야의 교류를 활성화하자 (5) 이상의 내용을 추진할 실무 논의를 시작하자 (6)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서울에 방문하자는 것입니다.
‘대북 송금 특검’ 같은 후과도 있었지만 615공동선언은 한반도 평화에 기여합니다. ‘평화를 위해서는 공동의 번영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 같은 큰 경제협력이 추진된 덕분입니다. ‘번영과 평화’, 이 생각을 바탕으로 정부는 한반도를 넘어 아시아 평화를 고민하는 국제 포럼을 만들게 됐는데요. 그것이 바로 2001년 6월 15일 시작된 제주포럼입니다.
2023년, 평화로운 시대의 끄트머리
2000년에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할 수 있었던 것은 세계 질서의 안정기 속에서 북미 관계가 개선됐기 때문입니다. 구소련이 해체(1991)됐고, 중국이 WTO에 가입(2001)했습니다. 냉전은 끝났고, 중국은 ‘세계의 공장’이 됐습니다. 세계 각국이 공동번영을 기대할 수 있던 시대였습니다. 이때 김대중 정부는 미국을 설득해 남북정상회담을 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세계는 뒤숭숭합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전쟁 중입니다. 중국은 대만을 침공할지도 모릅니다. 미국과 중국은 더 이상 협력하지 않고, 주변국들에 ‘양자택일’을 요구합니다. 중동 국가들, 인도, 터키, 브라질 등 기존 미국 중심의 국제 질서에 동의하지 않는 국가들이 늘어납니다. 긴장감이 높습니다. ‘공동번영’보다 ‘각자도생’이 어울리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제주포럼의 정신이 아이러니하게 다가왔습니다. 평화의 토대가 공동번영이라면, 공동번영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든 공동번영의 방안을 찾아내야 할까요? 아니면 공동번영 없이 이룰 수 있는 평화의 방안을 찾아야 할까요? 그것도 아니라면 평화를 기대하지 않고 각자도생의 방책을 모색해야 할까요?
제주포럼의 여러 발표를를 들으면서 저는 이 질문들의 답, 힌트를 얻고 싶었습니다.
희미한 실마리
흥미로운 발표들이 많았지만, 저의 궁금증에 대한 직접적인 답이나 힌트는 찾기 어려웠습니다. 번영을 통한 평화를 이야기하는 포럼이다 보니 경제협력 방안을 논하는 세션이 많았습니다. 특히 기후 위기 대응, 에너지 위기 대응, 녹생성장 같은 키워드의 발표가 많았습니다. 정말 중요한데 긴장감 높고, 급변하는 세계정세를 생각하면 협력이 점점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외교 문제로 사업이 중단될 위험이 점점 높아질 테니까요.
포럼에서 인상적이었던 발표들은 모두 2030 연사들의 발표였습니다. 아세안의 국회의원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리더스 포럼’이라는 세션이 있었습니다. 각국의 의원들이 돌아가며 발표했습니다. 가장 인상적인 분은 젊은 말레이시아 하원의원이었습니다. “미래세대의 평화와 번영은 우리에게 달려있다. 여기 있는 여러분이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고 소리 높였습니다.
다음 날 제주 청년들이 기획한 세션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청년자치’가 주제였는데요. 제주의 청년 시민들이 효능감을 느낄 수 있는 정책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이 세션에서 한 20대 연사의 발표가 기억에 남습니다. 그는 “우리가 바라는 미래는 누가 대신 만들어 줄 수 없고, 우리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공동번영이 어려워진 오늘날에도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 이웃의 평화를 지키는 일은 우리 몫입니다. 누가 대신해 줄 수 없고, 어려워도 우리가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는 것, 김대중 대통령이 남긴 제주포럼이 제게 지어준 결론입니다.
이런 고민 하다가 정작 가고 싶었던 회국수 집을 못다녀왔지 뭐예요!
평화의 섬 제주에 또 가고 싶은 이대호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