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로 쓰기 어려웠던 글
권력형 성범죄 재발방지 (1)
어려운 요청을 받았습니다. ‘첫 변론’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 영화가 개봉할 예정입니다. 서울시장 성폭력 사건을 다루는 영화입니다. 피해자의 주장에 문제를 제기하는 내용입니다. 이 영화의 개봉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에 와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서울시장 성폭력 사건 피해자의 직장 동료였고, 가해자의 부하직원이었던 제 말도 있으면 좋겠다고요.
기자회견은 어렵지 않습니다. 반갑고 감사했습니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피해자를 돕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건 저의 말입니다. 피해자 김잔디 님과 비슷한 어려움을 겪은 사람들이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오는 데에 조금이라도 도움 되는 말이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무슨 말을 해야 여전히 어려움을 겪고 있는 동료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를 잘 모르겠더라고요.
마음에 별로 들지 않았지만, 고민하며 쓴 원고를 들고 기자회견에 갔습니다. 안 그럴 줄 알았는데 회견문을 읽다가 목이 메었습니다. 어느 대목에서 제가 목이 메었을지, 한 번 읽어보시겠어요?
서울시장 성폭력 사건 피해자 동료가 드리는 글 (23. 6. 27)
전 서울특별시 미디어비서관 이대호
저는 2016년 12월부터 2018년 4월까지 서울시에서 일했던 이대호라고 합니다. 재직 기간 대부분을 시장실에서 미디어비서관으로 일했습니다. 그 기간 동안 서울시장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와 함께 일했습니다. 약 스무 명으로 구성된 비서실에서 저는 피해자와 동료 사이였습니다.
사건 이후 피해자에게 가해지는 비난과 신상 유포, 불필요한 관심은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무서웠습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피해자가 극단적인 선택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피해자는 정말 많이 힘들어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당시 피해자를 버티게 했던 원동력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가족을 비롯해 피해자를 사랑하고 아끼고, 돕는 사람들의 존재였습니다. 피해자를 돌보고 지키기 위한 가족들의 헌신, 지원단체의 가열찬 조력 활동은 거센 비난과 의심으로부터 피해자를 지켰습니다.
다른 하나는 신뢰받는 기관의 판단이 이뤄져 피해자의 결백이 증명되고, 관심사에서 멀어져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리라는 기대였습니다. 가해자가 사망해 경찰은 수사를 중단했지만, 국가인권위원회가 이 사건에 대해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결과가 나오면 매듭지어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국가인권위원회의 직권조사 결과 발표는 끝이 아니었습니다. 권위 있고 조사력을 갖춘 기관이 수십 명의 증인을 조사해 성희롱 사실을 인정했고, 많은 사람들이 의심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있었습니다. 진상규명이 충분하지 않다며 말하고, 댓글을 달고, 책을 쓰고, 기사를 쓰고, 소송을 제기하고, 이제는 다큐멘터리를 만듭니다.
솔직히 저는 이번 다큐멘터리 제작 소식을 보고 너무나 큰 절망감과 우울감을 느꼈습니다. 저는 피해자에게 늘 ‘시간이 지나면 점점 좋아질 것’이라고 말해왔습니다. 느리지만 나아지고 있다고, 소수의 사람들이 여전히 의심을 품고 있을 뿐이라고요. 점점 사람들은 이 사건을 잊고 있으니, 이따금 날아오는 화살들을 너무 신경 쓰지 말자고요.
그러나 다큐 개봉 소식을 접하고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이거 정말 끝이 나기는 하는 건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피해자도 비슷한 감정을 느끼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모든 사람의 의심을 지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공론 영역에서만은 피해자를 거짓말쟁이로 몰고, 가해자가 억울한 일을 당했다는 주장이 사라져야 피해자가 일상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자기가 떳떳하면 그만이다, 표현의 자유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저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피해자가 괴로운 것은 떳떳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고통스러운 경험을 상기하는 것이 괴롭기 때문이고, 게다가 자신을 의심하는 목소리를 듣고, 누군가는 그 주장에 동조하는 상황이 끔찍하기 때문입니다. 이 고통은 실존하는 고통입니다. 피해자가 일상에 집중할 수 없게 만드는 통증입니다.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분들께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행위는 피해자의 삶의 의지를 꺾는 행동입니다. 그리고 공인도 아닌 피해자가 여론의 관심을 감당해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정 하고 싶은, 새로운 이야기가 있다면 고인의 유족이 진행하고 있는 행정소송에 증거로 제시하시고, 큰 고통을 겪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행위를 중단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하는 행동은 책임지지 못할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아주 잘못된 일입니다.
이 기자회견에 뜻을 함께 하는 분들께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연대의 마음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하나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앞으로 또 2차 가해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때에도 연대해주세요. 연서명에 이름을 남겨주시고, 연대의 말을 적어주세요. <첫 변론>을 만드는 일이 사람을 죽이는 일이라면, 여러분의 연대는 사람을 살리는 일입니다. 부디 그 일의 중요성과 가치를 알아주시고, 앞으로도 함께 해주시기를 진심으로 부탁드립니다.
7월 5일 오전에는 서울시장 성폭력 사건을 비롯한 권력형 성범죄 재발방지 대책, 피해자의 일상회복 방안을 의논하는 토론회가 국회에서 열립니다. 이 토론회에도 많은 관심 가져주시기를, 참석이 어려우시다면 연대의 말씀을 남겨주시기를 염치 불구하고 부탁드립니다. 동료인 저조차도 이렇게 괴로운데, 당사자와 그 가족들의 절망이 얼마나 클지 사실 생각할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절망에 빠진 이웃에게 손 내밀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또 2차 가해가 일어날 것입니다’까지 읽고, ‘그때에도 연대해주세요’라고 말하려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각자의 문제로 사람들은 바쁩니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계속 도와달라는 말이 염치가 없는 줄 압니다. 근데 피해자가 겪은 어려움을 생각하면 도무지 그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게 비통하고 절박해서 목이 메었던 것 같습니다.
내일은 국회에서 토론회가 열립니다. <권력형 성범죄: 안전한 민주당으로 가는 길>이라는 제목입니다. 마음 굳게 먹고 좀 더 잘하고 오도록 하겠습니다.
다녀와서 소식 또 들려드릴게요.
염치없지만 많은 관심과 연대를 부탁드리는
당신의 친구 이대호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