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아름다운 정치

성동구 반지하 전수조사

이토록 아름다운 정치

자괴감이 듭니다. 지하차도에서, 초등학교에서, 수해복구 현장에서 사람들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정치가 시스템을 잘못 만든 탓입니다. 많은 분이 슬픔과 불안감을 느낍니다. 이럴 때 힘을 합쳐 문제 해결에 나서기는커녕 영향력 있는 정치인들이 서로 남 탓을 합니다. 제가 이 못난 정치를 조금이라도 바꾸고는 있는 건지 힘이 빠집니다.

이렇게 무력감이 들 때 꺼내보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한 편 있습니다. 정원오 성동구청장님과 그 동료들의 ‘성동구 반지하 전수조사’ 프로젝트입니다. 정치가 사람을 살리는 이야기인데, 한 번 들어보시겠어요?

신림동 반지하 일가족 사망 사건

출처: TBS

지난해 8월에 비가 많이 내렸습니다. 그때 관악구 신림동에서 반지하 주택이 침수돼 일가족 3명이 숨지는 안타까운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반지하 침수 문제가 공론화됐습니다. 서울시장은 바로 “반지하를 없애겠다”며 대책을 발표했습니다. 성동구청도 이때 반지하 주택의 수해 대책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성동구에도 반지하 주택이 많습니다.

성동구청의 결정은 ‘반지하 현장 전수조사’였습니다. 모든 반지하 주택에 찾아가 구체적인 상태를 확인하는 일입니다. 반지하 주택은 조금만 물이 불어도 위험한 곳, 상대적으로 안전한 곳, 살기에 상대적으로 괜찮은 곳, 당장 이주해야 하는 위험한 곳 등 다양합니다. 구체적이고 정확한 정보가 있어야 유형 별로 정확한 수해 대책을 세울 수 있다고 성동구청은 판단했습니다.

그런데 ‘조사 기준’이 없었다고 합니다. 조사 대상 주택은 약 5,000개였습니다. 5,000개를 유형 분류 없이 특성을 기록하면 대책을 세우기가 어렵습니다. 수해가 생겼을 때 얼마나 위험한지, 주거 여건이 괜찮은 곳인지 등 기준에 따라 등급을 매기고 유형을 나누어야 합니다. 문제는 이런 조사에 활용할 만한 반지하 주택 등급 평가, 분류 체계가 없었던 것입니다.

없어? 그럼 우리가 만들자!

출처: 정원오 성동구청장 페이스북

서울시에서 일할 때 흥미롭다고 생각했던 점인데요. 신규 정책, 사업 기획 보고서에는 늘 ‘사례’가 들어있습니다. 다른 지방정부, 외국 정부가 유사한 정책을 시행한 사례를 어김없이 소개합니다. 거꾸로 말하면 사례가 없는 정책이나 사업이 거의 없습니다. 정부는 어디에도 사례가 없는, 누구도 해본 적 없는 일을 하는 것에 큰 부담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반지하 주택 평가 분류 기준이 없다는 것은 성동구청에 큰 난관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원오 구청장님과 그의 동료들은 지혜롭게 난관을 돌파합니다. 이 분야의 전문가 집단인 성동구건축사협회와 함께 현장 조사를 하면서 스스로 기준을 만듭니다. 수해 상황에서 사람을 살릴 때 필요한 ‘새로운 기준’을 공무원과 전문가가 힘을 합쳐 만들어 낸 것입니다.

현장 조사도 어려웠다고 합니다. 낮에 찾아가면 집에 없는 경우도 많고, 수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었고요. 그래서 그렇지만 14명의 건축사가 한 명당 377채씩 나눠서 전수조사를 해냈습니다. 지난해 9월부터 12월까지 약 3개월 만에 해낸 일입니다. 그 결과 조사 대상 5,000여 채 중 1,453채에 지원 대책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조사 끝, 해결 시작

성동구의 반지하 지원정책

조사가 끝나고 성동구는 맞춤형 정책을 집행합니다. 당장 이주가 필요한 집에 사는 분들은 공공임대주택 등으로 이주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물을 막는 시설이나 환풍기, 제습기가 필요한 집에는 예산으로 설치를 지원했습니다. 전수조사 전에는 ‘반지하 몇 채’라는 뭉뚝한 정보밖에 없었으므로 할 수 없던 일입니다. 성동구는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문제를 해결해 갑니다.

반면 ‘반지하를 모두 없애겠다’고 했던 서울시는 약속을 못 지켰습니다. 반지하를 없애기는커녕, 전수조사도 포기했습니다. 서울시가 비현실적인 계획으로 시행착오를 겪는 동안 성동구는 문제를 해결합니다. 위험한 집에 사는 사람들을 이사 보냈고, 예방 설비를 필요한 곳에 설치했습니다. 이제 비가 많이 오면 누구부터 대피시켜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동네가 됐습니다.

이 이야기 처음 들으시지요? 그 사실이 이 이야기의 아름다움을 완성합니다. 비극이 생겨도 사람들은 금방 잊습니다. 대책에는 무관심합니다. 그런데도 정치인 정원오와 그 동료들은 프로젝트를 마무리 지었습니다. 누가 관심 가져주지 않아도, 가난하고 차별받는 사람들의 생명을 소중히 여겼으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반지하가 없어져도 또 다른 기형적 저렴주택이 가난한 사람들의 주거를 파고들 것이란 걱정이 있습니다. 가난을 없애는 일은 신도 못 하겠지만 기초자치단체로서 최저주거기준선을 높여줄 순 있다고 봤습니다. 주택정책의 권한을 가진 정부나 광역단체는 양질의 임대주택 공급을 늘려야 합니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정원오 성동구청장)

언젠가 아름다운 정치를 하고 싶은
이대호 드림.

*2023년 4월 1일자 한겨레  ‘다시 폭우가 ‘낮은 곳’ 덮치기 전에…‘물이 노리는 집’을 구하라’ 보도를 많이 참고했습니다. 상세하게 취재하고 기록하신 이문영 기자님, 생생한 이야기를 남겨주신 임경지 성동구 청년정책전문관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