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웬 밀키트?

그린벨트 프로젝트 (11)

갑자기 웬 밀키트?

‘그린벨트가 해산하게 된 결정적 이유’ 편지에서 망한 이유를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그린벨트를 하면서 배운 것을 소개합니다. 저는 그린벨트를 통해 좋은 정당을 만들려면 ‘밀키트’가 많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갑자기 웬 밀키트냐고요?

그린벨트에서 만든 두 개의 밀키트

그린벨트 V1 문제 정의 도식

지방선거를 목표로 운영했던 그린벨트 V1은 목적과 기능이 명확했습니다. 젊은 신인 출마자들에게는 중도 포기 위기가 자주 찾아옵니다. 이 위기를 이겨내고 모두가 완주하도록 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그래서 인맥이 없으면 알 수 없는 각종 정보를 공유하는 단톡방,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짝꿍 프로그램, 선거 경험자의 노하우 전수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했습니다.

이게 왜 밀키트냐고요? 만약 제가 민주당 당대표가 되어서 ‘젊은 세대를 대변하는 후보들을 더 많이 공천하라’는 미션을 부여 받았을 때, 바로 요리를 시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인 정치인 출마 지원 센터를 만들고, 센터에 어떤 기능들을 부여할지, 센터에는 어떤 사람들을 기용해야 할지 판단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비슷한 일을 해봤기 때문입니다.

‘당원으로 가입하라고 해서 가입했는데, 막상 뭐 할 게 없네요? 재미있는 것 좀 만들어 주세요’라는 미션을 받으면 지역별 공론장 프로그램을 만들 것입니다. 이건 그린벨트 V2 때 조금 해봤습니다. 그 경험을 살려서 설계도를 바로 짤 수 있습니다. 정당을 10첩 반상에 비유한다면 그중 한두 개의 요리는 바로 만들 수 있게 됐습니다. 그린벨트의 경험 덕분입니다.

냉장고를 부탁해

김은경 혁신위원회 (출처: 더불어민주당)

사회생활을 하면서 ‘한 번에 되는 일은 거의 없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새로운 일을 기획할 때는 눈부신 결과를 상상합니다. 근데 최선을 다해봐도 대부분 그저 그런 결과로 끝납니다. 100을 기대하면 10 정도로 끝나는 것 같아요. 그러다 그다음 도전, 그다음 도전을 거치다 보면 50, 70, 가끔은 100을 정말로 달성하기도 합니다. 반복과 축적이 기발한 아이디어보다 강합니다.

그런데 정당에서는 ‘반복과 축적’이 일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정당은 여론에 크게 좌우됩니다. 또 여론의 관심사는 단기적입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를 꾸준히 하기 보다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여론에 따라서 과업을 변경합니다. 전세사기 문제가 화두가 되면 전세사기신고센터를 만들고, 교권 침해가 문제가 되면 교권회복위원회를 만드는 식입니다.

정당의 발전을 위해 만드는 혁신위원회는 ‘냉장고를 부탁해’ 같습니다. 외부 인사를 초빙해 혁신위원회를 만들고 한두 달 안에 당을 발전시킬 대단한 혁신안을 내라고 합니다. 혁신위원회는 무엇이 들어있는지 모르는 냉장고(정당)를 넘겨받아 짧은 시간 안에 모두를 만족시킬 요리를 완성해야 하는 셰프입니다. 당연히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기가 어렵습니다.

좋은 정당을 만드는 방법

출처: 더불어민주당

짧은 시간 내에 성과를 보여줘야 하는 건 정당의 숙명입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좋은 정당을 만들려면 ‘밀키트’를 많이 만들어야 합니다. 변화 의지를 가진 사람이 권한을 갖게 된 순간에 바로 꺼낼 수 있는 밀키트가 많아야 합니다. 그래야 제한 시간 내에 보기도 좋고 맛도 좋은 10첩 반상을 차릴 수 있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은 요즘 혁신위원회를 운영합니다. 당 지지율이 낮습니다. 이대로 총선을 치르면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혁신위를 만들어 유권자들의 마음을 살 혁신안을 찾기로 했습니다. 혁신위는 벌써 ‘국회의원 불체포 특권 포기’, ‘국회의원이 징계 전에 탈당 못 하게 하기’ 등의 혁신안을 냈습니다.

가장 화제가 된 혁신안은 ‘불체포 특권 포기’입니다. 근데 제가 주목하는 활동은 ‘미래혁신단’ 운영입니다. 18세~34세 시민이 5회 혁신 방안 리포트를 제출하면 100만 원을 지급하는 작은 공모 사업입니다. 당장 의미 있는 결과가 나오긴 어렵겠지만, 이런 사업이 밀키트 생산을 촉진합니다. 여기서 시작해 해커톤도 열고 프로젝트 지원 사업도 했으면 좋겠습니다.

큰 기업에 사내 벤처가 필요하듯, 큰 정당에도 당내 스타트업이 필요합니다.


물론 ‘좋은 정당’이 완성도 높은 프로그램만으로 만들어지지는 않습니다.
기득권에 맞설 수 있는 용기, 저항을 잠재울 수 있는 정치력도 필요합니다.

그런 건 또 어디서 배울 수 있는 걸까요?
이대호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