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가해의 패턴
권력형 성범죄 재발방지 (2)
여러분이 평범한 직장인이고, 직장에서 상사로부터 어떤 피해를 입었다고 가정해 보세요. 그런데 그 상사가 영향력 있는 인물이란 이유로, 누군가가 ‘피해가 정말 사실이냐’고 의심하는 영화를 만들고, 전국을 돌며 후원자 시사회를 개최한다면 ‘표현의 자유이니 보장해야 한다’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서울시장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가 실제로 겪고 있는 일입니다.
영화 <첫 변론> 상영금지 결정
법원은 최근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죽음을 다룬 영화 <첫 변론>을 상영 금지했습니다. 우리 법원은 표현의 자유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2014년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1995년 이래 상영금지 결정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법원 입장에서 상영금지는 매우 어려운 결정이란 뜻입니다. 그런데도 <첫 변론>의 상영을 금지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1. “피해자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내용이고, 만일 이 영화가 상영·공개될 경우 이를 접한 관객들은 피해자가 망인에 대한 허위의 피해 사실을 수사기관에 고소했다는 인식을 갖게 될 가능성이 크다”
2. “(영화가 위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피해자에게 무분별한 가해 행위가 행해질 개연성을 배제할 수 없다”
3. “(2의 이유로)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가 발생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영화를 통한 표현 행위의 가치가 피해자 명예보다 우월하게 보호돼야 한다고 볼 수 없다”
4. "이 영화를 통한 주된 내용이 진실이라고 보기 어렵다”
결정문이 구구절절 마음에 와닿아 소름이 돋았습니다. <첫 변론> 개봉 소식을 처음 들은 이후 퇴적물처럼 쌓아온 분노와 슬픔이 녹는 것 같았습니다. 법원이 사람을 살리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2차 가해의 패턴
벌써 3년입니다. 사건 직후에는 3년이 지난 지금까지 2차 가해가 이어질 줄 몰랐습니다. <첫 변론> 개봉 소식을 듣고서는 ‘이거 끝나기는 하는 건가?’하는 생각이 들어 깊은 좌절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3년쯤 겪어보니 2차 가해의 패턴이 보입니다. 패턴이 보이니 앞으로의 추세를 전망할 수 있고, 시간이 좀 걸려도 끝나긴 끝나겠구나 싶습니다.
권력형 성범죄 2차 가해는 아무 때나 일어나지 않습니다. 2차 가해의 동기가 있는 사람도 평소에는 이 사건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다 사건과 관련된 뉴스가 나오면 적극적으로 말하고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인터넷에 댓글을 달고, SNS에 피해자를 공격하는 글을 쓰고, 언론에 나와 말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활동은 뉴스로 또 만들어져 전파되고, 다른 2차 가해를 불러옵니다.
즉, 뉴스가 있어야 2차 가해가 활성화됩니다. 뉴스 유형은 (1) 법률 소송 (2) 추모 캠페인 (3) 2차 가해자의 정치 활동이 대표적입니다. 다행히 대부분 바람직한 판결들이 나고 있고, 대법원판결 이후에는 소송 관련 뉴스거리가 없을 것입니다. 추모 캠페인도 기일에 추모식 하는 것 외엔 확장 조짐이 없습니다. 이렇게 2차 가해 계기가 줄어드는 추세이니 끝이 나긴 하겠구나 싶습니다.
내년 총선을 대비하자
우려되는 점도 있습니다. 바로 내년 국회의원 선거입니다. 내년 선거에서 서울시장 성폭력 사건과 관련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출마, 공천, 당선되는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2차 가해를 저지르고도 사과, 반성 없는 인물이 공직을 맡게 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여론과 언론의 감시가 있겠지만, 공천받고 당선되는 결과도 충분히 생길 수 있습니다.
지난 7월 국회에서 권력형 성범죄 재발방지를 주제로 토론회를 열었습니다. 재발방지를 위한 실질적인 대책을 몇 가지 제안했지만, 아쉽게도 당규 개정으로 관철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후, 문제해결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할지 고민도 하고 동료들과 논의도 하고 있는데요. ‘반성 없는 2차 가해자의 내년 총선 당선을 막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정치적 문제 해결 노력도 다 ‘일’입니다. 바쁜 일이 많아서 신경을 쓰지 못하면 타이밍을 놓칠 수 있습니다. 혹은 닥쳐서 부랴부랴 대응하다 제대로 못 할 수도 있습니다. 미리 벌어질 일을 내다보고, 함께 할 동료들과 상의하고, 상황 변화를 관찰하면서 캠페인을 준비해야 잘할 수 있습니다. 다행히 3년 동안 경험도, 동료도 늘었습니다. 이번엔 좀 더 잘할 수 있겠죠?
상영금지 결정이 매우 드물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정말 다행입니다. 꿈만 같은 결정을 끌어내기까지 고생하신 김재련 변호사님과 그 동료분들, 그리고 여전히 혹독한 겨울을 위대하게 견뎌내고 있는 김잔디 님께 열렬한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보냅니다.
당신의 친구 이대호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