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우정

계단뿌셔클럽 (39)

가짜 우정

토요일 저녁, 저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계단뿌셔클럽 가을시즌 마지막 날인 일요일에 비가 온다는 거 아니겠어요? 마지막 날을 ‘우천 취소돼서 아쉽네요! 안녕!’으로 끝내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번 시즌을 함께 한 사람들이 ‘좋은 마무리’로 기억할 ‘뾰족한 수’를 찾고 있었습니다.

“저희 지부는 우천 취소 없습니다”

일요일 오후 하늘

토요일 저녁부터 비가 꽤 올 것 같은 스산함이 이미 느껴졌습니다. 우천 취소 결정은 당일 오전 11시에 지부별로 하게 되는데요. 이대로라면 모든 지부가 우천 취소 결정을 할 것 같았습니다. 취소하더라도 잘 취소하는 방안이 있지 않을까 고민했습니다. 이왕 시간을 빼두었으니, 커피 마시는 수다 번개 모임이라도 만들면 어떨까 생각해보고 있었는데요.

그때 모 지부의 리더인 정 선생님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정 선생님은 “폭우가 오지 않는 한 취소는 안 할 거”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비가 올 가능성이 높으니 역 주변 큰 쇼핑몰 실내 장소 위주로 퀘스트를 짜줄 수 있느냐고 하셨습니다. 정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는데 물벼락을 맞은 것 같았습니다. 저는 왜 비가 오니 우천 취소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을까요?

저는 클럽 활동을 잘 취소할 방법을 고민했습니다. 그때 정 선생님은 비 오는 날 클럽 활동을 잘할 방법을 고민했습니다. 부끄러웠습니다. 특히 부끄러웠던 이유는 정 선생님이 휠체어 사용자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계단 문제가 이동약자와 친구들 모두의 문제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결정적 순간 저는 계단 문제 해결보다 함께하는 사람들의 심기를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우정의 한계

정복하다 만난 이화여대 캠퍼스의 가을

계단뿌셔클럽이 ‘이동약자와 그 친구들’을 주어로 강조하는 까닭이 있습니다. 계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동약자 당사자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의 힘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동약자가 아닌 사람도 누구나 이동약자가 될 수 있고, 동행인이 이동약자일 때는 함께 이동약자가 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당사자’의 범위를 넓히려는 시도입니다.

그러나 정작 저부터가 당사자성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당사자성이 없으면, 나의 문제가 아니면, 문제해결력을 갖기 어렵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당사자 범위를 넓히고 내면화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실제로 휠체어를 사용하는 동료들과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당사자성이 생기는 것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우천취소에 관한 대화에서 ‘한계’를 확인했습니다.

침대에 벌렁 누웠습니다. 그동안 이 문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해낼 수 있겠냐고 누가 물으면 “당연히 할 수 있다”고 말해왔습니다. 그런데 정 선생님과 저를 비교해 보니 정말 그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친구의 문제를 함께 해결해 보고 싶다는 나의 우정은 보기보다 시시하고 알량해서 문제 해결의 충분한 동력이 될 수 없는 건 아닐까요?

우정은 상호적이다

빵집의 가르침

“저는 평생 프로 불편러로 살아왔거든요. 항상 문제를 제기하고 잘못됐다고 지적하는 입장이었어요. 근데 저는 이 문제의 당사자니까, 다들 그러려니 하는 게 있더라고요. 오히려 비장애인이 편들어 주고 같이 이야기해 줬을 때 힘이 생기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계단뿌셔클럽의 취지가 좋다고 생각해요. 이동약자 아닌 사람들도 함께할 수 있으니까!”

우정이 만약 어려움에 처한 친구를 일방적으로 돕는 것이라면 저의 알량한 우정으론 문제를 돌파할 수 없습니다. 당사자가 아닌 저는 비가 올 때 ‘잘 취소할 방법’을 먼저 생각합니다. 근데 그렇게 물러날 생각부터 하는 사람 혼자서는 문제해결 못합니다. ‘비가 와도 할 수있는 방법’을 찾아내는 일을 반복해야 계단뿌셔클럽은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우정이 서로 돕는 거라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이번 우천 취소 논의 때처럼 제가 꾸준히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저는 문제해결력을 증폭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마지막 날 절반 이상의 지부에서 클럽 활동을 개최했습니다. 정 선생님의 의지가 제 생각을 바꾸고, 다른 리더들의 생각에 영향을 미치면서 만든 결과입니다. 서로 돕는 우정이라면 길이 있을 것도 같습니다.


일방적 우정이 있다면 아마 가짜일지도 모릅니다.
저에게야 말로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대호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