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됩시다
산문 (1)
SBS가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라는 다큐멘터리를 냈습니다. 대학로에서 극단 학전을 만들고 운영해 온 경영자이자 음악인 김민기의 이야기입니다. 설경구, 황정민, 조승우, 김광석, 윤도현 등이 학전 출신이란 점에 흥미가 생겨 보기 시작했는데요. 뜻밖의 화두를 마주했습니다. ‘어른’입니다.
어른의 퇴장
‘아침이슬’, ‘상록수’ 등의 히트곡으로 유명했던 작곡가 김민기가 1991년 대학로에 소극장 학전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단원들을 모집해 ‘지하철 1호선’이라는 뮤지컬을 제작합니다. 그런데 이 극단에는 특이한 점이 있었습니다. 전혀 검증되지 않은 무명의 배우들을 주로 기용했고, 모든 스태프, 배우들과 계약서를 썼고, 공연 매출과 상관없이 최소한의 생계비를 보장했습니다.
매달 대표가 단원들을 다 불러 모아 정산 결과를 공개하기도 했습니다. 매출 얼마, 수익 얼마, 그중 누구 몫이 얼마, 내 몫 얼마를 투명하게 발표했습니다. 또 지루할 정도로 기본기를 강조하는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했고, 성장하면 내보낸 뒤 신인을 뽑았습니다. 기라성 같은 배우, 가수들이 많이 나온 건 우연이 아니라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시스템을 만들고 유지했기 때문이구나 싶었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어른이 계신 줄 몰랐습니다. 입버릇처럼 배우들에게 “너희는 앞것이고, 나는 뒷것이다”라고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평생 노출을 꺼리며 본업에 몰두해 온 ‘뒷것 김민기’는 올해 초 학전의 문을 닫았습니다. 그리고 말기 암으로 투병 중입니다. 심상정의 정계 은퇴, 사회운동가 홍세화의 죽음을 함께 떠올리게 됩니다. 어른들이 시대 저편으로 퇴장하고 있습니다.
어른의 조건
좋은 어른들의 퇴장은 참 서글픈 일이지만 우리가 어른이 될 시간이 왔다는 걸 의미합니다. 세상에는 여전히 어른이 필요하고, 우리에게도 그 역할을 할 책임과 자격이 있으니까요. 그럼 이제 곰곰히 생각해 봐야 합니다. 각자 ‘좋은 어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그들의 어떤 행동, 면모에서 ‘어른 됨’을 느끼는 걸까요? 어른의 조건은 무엇일까요?
저는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거나 손해가 될 줄 알면서도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일을 실천하는 사람, 혹은 그러려고 애쓰는 사람을 어른이라고 생각합니다. 줄이면 ‘희생’입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일은 적극적으로 취하고, 피해가 올 것 같으면 피하는 게 자연스러운 세상입니다. 많이들 그러니까 흉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굳이’ 필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 어른입니다.
김민기는 90년대 당시 사례도 없었던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극단 시스템을 굳이 만듭니다. 유명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좋은 시스템’이 없어도 충분히 극단을 꾸려갈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연구, 관찰, 성찰을 통해 ‘단원들이 인간다운 대우를 받으며 일하고 성장하는 극단’을 만들었습니다. 이건 대표가 손해와 위험을 다 떠안는 거였다고 당시 동료들은 입을 모아 증언합니다.
어른의 나이
몇 살부터 어른으로 살아야 할까요? 나이가 많이 든다고 꼭 어른이 되는 것도 아니고, 나이가 어린 ‘좋은 어른’들도 세상에 많은 것 같습니다. 학전을 열어 신인 배우들을 뽑고 가르치던 김민기는 고작 마흔이었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도 저보다 나이가 많아 어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아니라, 또래 친구들이 제게 좋은 어른이 되어준 경험이 있습니다.
서울시장 성폭력 사건이 세상에 알려졌을 때, 저는 민주당과 당의 선배 정치인들에게 기대했던 바가 있었습니다. 피해자에 대한 인신공격, 신상 유포 같은 2차 가해를 중단하라는 입장을 내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좋은 어른들이 많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러나 그런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이름을 걸고 서명운동에 나서고, 규탄 성명을 내준 어른은 제 또래의 친구, 동료들이었습니다.
최근에 주간지 시사IN에서 인터뷰를 했습니다. 잡지를 받아보니 심상정의 정계 은퇴 뉴스, 홍세화의 부고와 같은 호에 계단뿌셔클럽의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전혀 의도한 바 없는 편집이지만, 혼자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기대하고 요구할 수 있는 어른들이 떠난 자리를 우리가 채워야 하는구나. 이제 우리는 꼼짝없이 어른이 되어야 할 나이가 됐구나!’
‘뒷것 김민기’ 다큐멘터리는 웨이브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어린이날을 맞아 어른 됨에 대해 생각해 보기 참 좋은 작품이니 시간 내서 보시기를 권합니다!
여러분의 친구
이대호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