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치매 검사

“다음 주? 월요일이요?”
“응. 그날은 바쁘냐?”
“음… 될 것 같긴 한데 왜요?”
“아니, 다음 주 월요일에 보건소로 치매 검사받으러 가는데 가능하면 보호자랑 같이 오라고 하더라고…”

긴장되는 치매 검사

할머니 손 잡고 간 대전 서구 보건소

월요일 오전 11시 30분, 대전 서구 보건소 앞에서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나이 먹어 귀도 잘 안 들린다, 맛도 잘 모르겠다, 여기저기 불편하다고는 하시는데 잘 걷고, 대화도 잘하십니다. 연세가 벌써 87세라는 게 신기할 정도로요. 근데 우리 할머니 평소보다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식사할 때도, 보건소에 가서 검사 대기하는 중에도 할머니는 좀 기운이 없어 보였습니다.

검사는 1시간 정도 걸렸습니다. 검사라는 게 여간 머리 아픈 것이 아니었다며 혀를 내두르는 할머니를 자리에 앉혀 드렸습니다. 저 혼자 간호사 선생님을 따라 상담실로 들어갔습니다. 검사 결과를 설명해 주신다고 해서 갑자기 긴장됐습니다. 그제야 할머니가 그날따라 말수가 없으셨던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치매라고 하면 어떡하지?’하는 생각이 들며 덜컥 겁이 났습니다.

“할머니 평소에 이상한 점 있으셨어요?”
“잘 모르겠어요. 제가 같이 안 살아서…”
“그렇죠. 같이 안 살면 잘 모르긴 하죠. 검사 결과 보니까 큰 이상 없으세요. 우선 이렇게 스스로 검사받으러 오신다는 거 자체가 크게 걱정 안 하셔도 되는 분이라는 뜻이기도 해요.”
“정말 다행이네요. 감사합니다.”
“서울에서 오셨죠?”
“아? 네. 휴가 쓰고 내려왔어요. 보호자가 같이 와야 한대서...”
“참, 혼자 오셔도 된다고 괜찮을 것 같다고 말씀드렸는데 번거롭게 서울까지 내려오셨네! 혼자 왔다 갔다 충분히 하실 수 있는 분인데. 자, 됐습니다. 매년 이렇게 한 번씩 검사만 받으시면 돼요.”

간호사 선생님과 상담실 밖으로 나와 “괜찮으시대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라고 했더니, 할머니는 ‘떼잉~’하시며 키 큰 간호사 선생님께 와락 안기셨습니다. “선생님! 고마워요!” 하시면서요. 선생님은 까르르 웃으며 할머니를 안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잖아요. 혼자 오셔도 된다고!”

‘일'이 중요하다는 국민적 합의

정작 본인부터가 일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대호

돌아오는 길, 간호사 선생님의 ‘혼자 오셔도 된다'는 말과 ‘월요일에 오면 안 되냐'는 할머니의 말을 비벼서 곱씹었습니다. 할머니가 굳이 손자랑 보건소에 함께 가고 싶었던 마음은 이해가 쉽습니다. 반면 생판 모르는 남인 저의 회사 사정까지 걱정하는 간호사 선생님의 마음은 곰곰히 생각해 본 뒤에야 짐작이 갔습니다. 일하는 사람 방해하는 거 아니라는 국민적 합의입니다.

우리 사회에는 ‘일’이 제일 중요하다는 합의가 있습니다. 구성원을 생산 현장에 총동원하고, 그 현장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고, 그걸로 최선의 경제성장을 이루어야 ‘좀 먹고살 만한 세상'이 된다는 믿음은 뿌리 깊습니다. 요즘은 이 믿음에 대한 회의도 많지만, 여전히 규범입니다. ‘일하는 사람 방해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87세 어르신의 마음보다 손자의 직장생활을 걱정하게 합니다.

이 합의로 우리가 얻은 것은 달콤합니다. 풍요로운 소비사회를 이룩했습니다. 2차대전 이후 한국처럼 된 나라가 없으니 비범한 성과입니다. 근데 치매 검사의 경험은 손해 본 것을 생각해 보게 됐습니다.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기뻐할 시간, 슬픈 일을 함께 견뎌낼 기회, 힘겨운 순간에 서로 의지할 관계를 다소 포기했습니다. 데면데면 어색하니 외주화해도 마음이 편합니다.

예상되는 한국적 전개

작년에 찍은 할머니와 이대호

대신 관계를 곳곳에 외주화했습니다. 얼마 전 친구 H와 나눈 대화입니다.

“아는 교수님이 해외 학회에서 한국의 기술 기반 정책 사례를 발표했는데 외국 학자들이 놀라더래요.”
“왜요? 우리나라 기술 수준이 높아서?”
“아니, 그게 아니라, 너희 나라는 어떻게 정책에 사람이 아예 없느냐고 신기해하더라는 거예요. 요즘 AI 스피커로 고독사 막기, 노인 말벗하기 같은 거 많이 하잖아요. 그런게 미국, 유럽 쪽에서 보기에 이상한 접근이라는 거예요. 사람이 아예 없는 방식으로 돌봄이 제대로 되겠느냐고."

사회가 풍요로워지면서 돌봄 정책을 확대했습니다. 필요했고 중요한 일입니다. 근데 ‘일하느라 바쁜 사람 방해하지 않도록’ 돌봄을 모두 국가에 외주화하는 방식으로 발전해 온 것 같습니다. 보건소 서비스가 너무 훌륭해 그런 생각이 더 들었습니다. 다만 좀 외로울 뿐, 자식, 손주 없이 홀로 이용할 수 있는 친절하고 야무진 시스템이 갖춰져 있었거든요.

고령화로 돌봄 수요가 점점 늘어나 비용을 줄여야 합니다. AI와 로봇이 천군만마가 될 것입니다. 이대로 시간이 더 흐르면 손자 회사 걱정하는 간호사 선생님 대신 AI가 생성한 음성이 전화를 걸고, 키오스크가 치매 검사를 진행하고, 로봇 간호사가 결과를 안내해 줄 수도 있겠죠. 로봇 간호사가 ‘정상'을 안내해 주는 순간, 제가 안도감과 감사한 마음에 와락 안길지 잘 모르겠네요.


할머니가 제 손을 잡고 치매 검사를 받으러 가고 싶었던 것처럼, 저 역시 외로운 노인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여러분은요? 그럴 때 해결의 대상은 ‘기술 발전'이 아니라 ‘사회적 합의'입니다. 관계보다 생산을, 생산 너머의 소비를 중시해 온 우리의 규범을 조절하지 않으면 미래를 바꿀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검사 결과 듣는 순간 긴장이 와르르 풀어지던 할머니 얼굴이 자꾸 생각나는
이대호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