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난 불공정해지고 싶다

<크러셔 클럽> 가을시즌 준비는 ‘리더그룹 모집’으로 시작됩니다. 4개월의 정규시즌을 함께 꾸려갈 동료 열두 명을 모았는데요. 지난 시즌이 나름 성공적이어서 쉬울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다. 전혀 예상 못 한 함정에 두 발이 빠지고 말았습니다!

낙관주의자의 눈물

정말... 분위기 좋아보이는데...

<크러셔 클럽>의 지난 봄시즌 정말 분위기 좋았습니다. 근거를 들어 보겠습니다. 함께 시작한 60명의 크루 중 무려 43명이나 결과공유회에 참석했습니다. 4개월짜리 프로그램이라 관심도가 떨어질 만도 했고, 참석하지 않아도 아무런 손해 없는 마무리 행사였는데 3분의 2 이상 참석했습니다. ‘이 기세를 몰아가면 다음시즌 무난하겠구나!’라고 제가 생각할 만도 했죠?

가을시즌 리더그룹 모집 인원을 12명으로 정하곤 속으로 굉장히 걱정했습니다. 12명 훌쩍 넘게 너무 많은 분이 지원하시면 죄송해서 어떡하나 해서요. 지난시즌에는 관심도가 높지 않아 선착순으로 열 명을 겨우겨우 채웠는데, 이번에는 당락이 있는 공정한 심사 절차가 필요할 것 같았습니다. 모집 인원 12명보다 많은 사람이 지원할 경우 모두를 모실 수는 없으니까요.

근데 예상이 완전히 빗나갑니다. 오픈런은 없었습니다. 리더 모집을 시작했지만, 며칠이 지나도 지원자가 거의 없었습니다. ‘정말 아쉽지만 이번에는 리더로 함께 하실 수 없을 것 같아요’라는 말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하고 있었는데요. 전혀 걱정할 필요 없었습니다. 목표한 12명을 채우는 것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 됐기 때문입니다! 하하하! 괜한 걱정을 다 했네!

원인은 두 가지

꼬실 때 불쌍한 표정이 중요합니다

지난 시즌 리더 모집 과정을 복기하면서 원인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지난 시즌에 리더 모집에 유효했던 전술들을 이번에는 전혀 쓰지 않았다는 걸 깨닫게 됐거든요.

  1. ‘네가 필요해’ 전술
  2. ‘너도 할 거임?’ 전술

‘네가 필요해’ 전술은 1:1로 ‘귀하가 얼마나 우리 팀에 중요한 사람인지’ 고백하는 방법입니다. 지난 봄시즌에는 제가 적극적으로 꼬셨습니다. 개인별 설득 논리를 준비해 전화 통화로 한참 대화하거나, 찾아가서 만났습니다. 설득 논리의 핵심은 “<크러셔 클럽>에는 당신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력이 안 되면 어쩔 수 없지만, 꼭 같이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너도 할 거임?’ 전술크루가 크루를 꼬시는 것입니다. 크루 A, B가 친한 사이일 때, A에게 연락해서 B 좀 꼬셔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 할 건데 너 안 할 거야?”라고 A가 B에게 이야기하는 거죠. 그 말을 들은 B는 ‘아… 바쁜데… 그래도 그냥 해볼까? 나 빼고 재밌게 노는 꼴은 내가 못 보지!’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만큼 진정성 있고 강력한 설득 전술이 없습니다.

이번엔 두 전술 모두 쓰지 못했습니다. ‘공정성’ 때문입니다. 저는 지원자 미팅과 심사를 해야 합니다. 그런 제가 특정인에게 미리 권유하는 것도, 특정인에게 권유해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공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특정해 같이 하자고 설득을 할 수 없었던 것이죠.

다정 VS 공정

너무 마음에 드는 뜨개질 버기

마감 기한이 거의 다 됐고, 온라인 설명회까지 했지만 지원자가 생각보다 적었습니다. 모집이 성황리에 잘 끝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거 ‘네가 필요해’, ‘너도 할 거임?’ 전술을 가동해 그래도 관심이 있을 것 같은, 함께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크루들을 설득했던 것이 큰 역할을 했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끝까지 가보니 좋은 분들이 잘 손 들어주신 덕분에 마무리를 잘 지을 수는 있었습니다.

고비는 넘겼지만, 어려운 문제가 남았습니다. 다정과 공정은 충돌합니다. 저도 사람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더 마음이 가고, 함께 하고 싶은 동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리더그룹을 모집할 때 공개적인 절차를 생략하고 주관적으로 팀을 꾸리는 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폐쇄성이 생겨 새로운 사람의 유입과 순환을 방해하는 부작용이 명백하기 때문입니다. 확장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합리적 절차’로 리더 모집을 해보려고 고민과 준비를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원활하지 않았습니다. ‘공정성’은 구성원들이 공동체에 대한 신뢰감을 형성하는 데 꼭 필요합니다. 근데,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크루들의 불 꺼진 성화에 불을 붙이는 건 ‘공정성’이 아닙니다. ‘네가 필요해, 너랑 함께하고 싶어’라는 배타적인 다정(多情)함입니다.


저 같아도 그럴 것 같습니다.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다정 공정 모두 중요한데 둘 사이가 이렇게 충돌할 줄이야!

참으로 난처한
이대호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