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의 조언을 듣지 않아 🐶고생한 이야기

계단뿌셔클럽 (53)

전문가의 조언을 듣지 않아 🐶고생한 이야기

새해를 맞아 좀 고상하고 거창한 이야기를 써보려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연말에 책을 몇 권 읽었더니, 인류 문명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에 대한 생각이 깊어졌거든요. 그런데 목요일에 생긴 사건 때문에 그 얘긴 미룹니다. 이 사건은 몇 달 전 내렸던 ‘작은 결정’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단독대표로 설립하는 것이 어때요?

왜냐하면 이런 곳에 자주 가야한다

계단뿌셔클럽은 며칠 전 ‘사단법인’이 됐습니다. 사단법인이 되려면 까다로운 점이 많습니다. 실제로 설립까지 우여곡절이 길었습니다. 그렇지만 투명하게 단체를 운영할 수 있고, 기부금에 대한 세액공제 혜택도 드릴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지속가능성을 위해 작년 봄부터 사단법인 설립을 추진했습니다. 안 될뻔한 위기가 좀 있었지만, 많은 분의 도움으로 최근 완료됐습니다.

처음에 신청 서류를 쓸 때, 이 과정을 도와주신 전문가 김 선생님이 ‘서류상으론 공동대표 말고 단독대표로 하는 게 어떠냐?’고 조언하셨습니다. 사단법인이 되면 행정 처리할 일이 많습니다. 세무서, 은행, 등기소 등에 갈 일이 많은데요. 그때마다 공동대표 두 사람이 직접 가거나 위임장을 써야 해서 몹시 번거롭다는 겁니다. 게다가 수빈님은 휠체어를 사용하니 더 불편할 거라고요.

저희는 ‘그래도 공동대표로 하자’고 결정했습니다. 대단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어요. 형식과 실체가 같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서류상으로라도 단독대표로 되어있으면, 수빈님이 혹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을 때 도망가기 쉽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건 절대 안 되죠. 김 선생님은 “뭐… 좋습니다. 근데 좀 불편하긴 할 거에요” 하셨습니다.

그때는 이 결정이 불러올 재앙을 알지 못했습니다…

목숨(?) 걸고 통장 만들기

울퉁불퉁 못된 보도블럭

사단법인 설립 후 첫 미션은 ‘법인 통장 개설’입니다. 사업자등록증 등 필요 서류를 출력해 수빈님과 룰루랄라 K은행에 갔습니다. 정문에 계단이 있어 후문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이 정도야 뭐’였습니다. 근데, 창구에서 난색을 보였습니다. 세무서에서 발급한 ‘사업자등록증 원본’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리고 요즘 사고가 많아 계좌 개설 자체가 쉽지 않고, 개설하더라도 하루 100만 원 이체 한도는 풀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날 반드시 개설을 해야 했습니다. 일단 세무서에 가서 사업자등록증 원본을 받고, 여러 은행을 방문해 계좌 개설이 가능한지 확인해야겠다는 판단이 섰습니다. 문제는 영하 10도였고, 세무서까지 가는 길이 울퉁불퉁하고, 어느 은행이 호의적일지 알기 어렵다는 점이었습니다. 저희는 머리를 굴려 세무서에 갔다가 거래 이력이 좀 있는 H은행에 가보기로 했습니다.

대모험이 시작됐습니다. 세무서 가는 길 1차 위기가 왔습니다. 10분 정도 칼바람을 맞으며 이동했는데요. 수빈님이 영하 10도에 맨손으로 휠체어를 굴리다 보니 손에 감각이 없어진 겁니다. 다급히 카페로 피신해 한동안 몸을 녹였습니다. 다시 10분을 이동해 세무서에 도착했다고 생각한 순간, 돌부리에 걸려 수빈님이 휠체어에서 전방 공중으로 ‘붕~’하고 날았습니다…!

하하하...하하하하하...!

천만다행이 제가 가까스로 붙잡아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놓쳤으면 그대로 바닥에 부딪혀 아주 크게 다칠뻔했습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아찔합니다. 통장 만드는데 목숨을 걸 뻔했습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사업자등록증을 떼서 H은행에 부랴부랴 갔는데요. H은행 앞에는 크고 육중한 계단이 다섯 칸 있었습니다. 저걸 올라가도 은행 출입구에 계단이 네 칸 또 있었습니다.

신이시여! 황당해서 둘 다 웃음이 났습니다.

누구나 도전할 수 있는 세상

통장개설 기념회식

계단 아홉 칸을 넘고 들어와 그저 계좌를 만들고 싶다고 말하는 저희가 결연하고 절박해 보였던 것 같습니다. H은행은 순순히(?) 계좌를 만들어주셨습니다. 전문가 조언대로 ‘서류상 단독대표’를 했으면 안 했을 고생입니다. 이 시간과 체력을 아껴 다른 일을 했으면 주중에 할 일을 다 못 해 오늘처럼 주말까지 일할 필요도 없었겠죠. 전문가의 조언에는 그만한 이유가 다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집부리길 잘했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장애인이, 장애인과 함께 공동창업하면 어떤 난관을 돌파해야 하는지 제대로 알 수 있게 됐습니다. 앞으로 누구나 공평한 여건 속에서 도전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려면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지 자세히 알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일련의 경험은 지금 겪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혜가 되겠죠?

저는 다양한 사람이 주체적으로 도전하고, 자신이 겪는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고자 마음 먹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야 지금 풀리지 않는 문제들이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마치 우리가 계뿌클의 도전을 결심했기 때문에 계단 문제의 해결 가능성이 높아진 것 처럼 말이죠. 근데 다들 도전 좀 하라고 부추기려면 최소한의 여건은 좀 갖춰야하지 않겠어요?


이날의 모험에는 사실 여러 조력자가 계셨습니다. 연신 미안하다며 휠체어를 함께 들어주신 H은행 건물 관리인 선생님, 계좌 개설의 근거를 열심히 찾아주신 6번 창구 최 과장님, 사업자등록증 어디에서 받는 건지 질문했을 뿐인데 바로 출력해주신 공무원 선생님께 감사 드립니다…

아직도 간담이 서늘한
이대호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