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계단 뿌실 때인가?
산문 (7)

비상계엄 이후 우울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근데, 저는 사실 괜찮았어요. 감정 변화가 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말 제 마음과 생각이 크게 달라졌습니다. 대통령의 탄핵과 구속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폭력배들이 법원을 습격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생각이 변했습니다.
지금 계단 뿌실 때일까?

서부지법 습격 사건을 접했을 때, 아름다운 정원에서 물을 주다 저 멀리 큰불이 난 걸 목격한 느낌이었습니다. 아담한 정원을 정성껏 돌보며 하루하루 열심히 살고 있는데, 갑자기 저 멀리에 큰불이 난 겁니다. 겁이 덜컥 나며 심각한 고민에 빠집니다. ‘불이 여기까지 번져와 이 아름다운 정원을 다 태워버리면 어떡하지? 물을 줄 때가 아니라, 저 불을 끄러 가야 하는 건가?’
이 비유에서 ‘불’은 법치주의의 위기, ‘물’은 계단뿌셔클럽을 가꾸는 일입니다. 제가 계단뿌셔클럽에서 일하는 까닭은 이동약자와 그 친구들이 겪는 이동의 문제가 정말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법치주의 질서가 단단해서 일상의 평화가 유지된다는 걸 전제로 합니다. 폭력배가 법원을 습격하는 세상이라면 우선순위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극단주의자들이 법원과 수사기관을 공격하는 일이 자꾸 생기면 법치주의가 파괴됩니다. 객관적으로 수사하고 판결해야 할 사람들이 위협을 느끼면, 수사와 처벌이 제대로 안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극단주의자들은 더 힘을 얻고, 폭력을 억제하는 힘이 약해집니다. 선량한 사람들이 일상에서 불안과 공포를 심각하게 느끼게 됩니다. 일상의 평화가 깨질 수 있습니다.
그 지경이 될 수도 있으니 일단 불 끄러 가야 하는 거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내란성 우울증

그래서 서부지법 습격 사건 이후로 마음이 심란했습니다. 물 주고 있을 땐가, 불 끄러 가야 하는 거 아닌가 고민하느라 시간만 낭비하고요. 그러다 며칠 전 아름다운재단에서 연 ‘결과공유회’ 행사에 갔습니다. 계단뿌셔클럽이 작년 한 해 ‘변화의 시나리오’라는 지원사업의 도움을 받았는데, 지원받은 단체끼리 모여 한 해의 결과를 발표하는 자리였습니다. 가서 시무룩히 앉아 있었는데요.
20여 개 팀이 각자의 정원을 무럭무럭 길러내는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이주민 자녀들의 진로 상담을 돕는 팀, 공영 장례 운동을 통해 누구도 홀로 장례를 치르지 않도록 돕는 팀, 젊은 세입자들이 피해를 보지 않게 가이드북을 만드는 팀, 중년 돌봄 노동자 여성들과 연극을 만드는 팀, 각자의 정원에 온 정성을 쏟고 있었습니다. 발표를 듣다 보니 마음이 좀 편안해졌습니다.
‘그냥 하던 일 열심히 하면 되겠구나’ 싶더라고요. 우리가 혼자라면 작은 정원 가꾸어봐야 소용없겠지만,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각자의 정원을 무럭무럭 기르고, 연결되어 울창한 숲이 된다면 거대한 불이 와도 꺼뜨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우정과 협력을 위해 애쓰고 있다는걸, 우리는 혼자가 아니란 새삼스러운 사실을 확인하니 희망을 느꼈습니다.
불 끄기 VS 물 주기

약간은 억지로 참석했던 ‘결과공유회’였습니다. 행사 시간도 너무 길다고 생각했어요. 오후 내내 진행되는 행사였거든요. 행사 진행자 임 선생님이 시작할 때 그러시더라고요. “그동안은 몇 팀만 뽑아서 결과 공유 기회를 드렸는데, 다들 말하고 싶다고 하셔서 오늘은 모든 팀이 발표할 거예요.” 그 긴 발표를 들으면서 저뿐만 아니라 다들 용기와 위로를 얻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불 끄기’, 그러니까 법치주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 위와 같은 직접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것도 중요할 것입니다. ‘법치주의를 지켜야 할 필요성을 알리는 캠페인 전개’, ‘반대자를 설득하기 위한 연구와 조사’ 같은 일이겠죠. 법치주의의 위기에 경각심을 느끼는 사람의 수를 늘리고, 반대자를 설득한다면 위험을 줄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잘할 수 있는 일은 ‘물 주기’입니다. 폭력이 아니라 우정과 협력을 믿는 사람을 늘려서 우리의 공화국을 지킬 수 있습니다. 우정을 기치로 사람들을 연결하면 평범하고 선량한 사람들이 위기로부터 서로를 돕고 보호합니다. 결과적으로 법치주의 질서를 지키는 일입니다. 또 우리 비전에 공감하게 된다면 법원을 습격하는 일엔 흥미를 못 느낄 것 같기도 하고요?
‘뭐라도 더 해야 하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또 든다면, 불 끄러 갈 게 아니라 물을 더 잘 줄 방법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조금 더 필사적으로, 최선을 다해, 우리 공동체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여러분의 친구
이대호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