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금 인상 없이 재계약한 비결
산문 (8)

저는 전세 세입자입니다. 5월이면 2년 계약 만기입니다. 지금 사는 집이 마음에 듭니다. 재계약해서 더 살아야지 진작 마음먹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상황을 파악해 보니 전세가가 꽤 올랐더라고요. 전세(戰勢)가 불리하다는 걸 확인하자 마음이 비장해졌습니다.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으리라, 필요하다면 기꺼이 야비해지겠다 다짐하고 재계약 협상을 시작합니다.
냉혈의 협상가 이대호

잘 모르겠더라고요. 처음 계약은 부동산에 찾아가면 되는데, 재계약은 어떻게 시작하면 되는 걸까요? 헬스장 기간 연장하듯 임대인(집주인)에게 전화해서 말하면 되는 걸까? 그렇게 섣부르게 연락하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자칫 이 협상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이면 곤란합니다. 저는 이 협상에서 최대한의 이익을 추구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아주 철두철미해야 합니다.
인터넷에 검색해 보고 경험 있는 친구들에게도 물었습니다. 종합해 보니, 재계약 의사를 가진 제가 먼저 연락을 해야겠더라고요. 조심해야 할 것은 없는지, 제가 불리해지는 접근 방법은 없을지도 야비한 마음으로 찾아보았는데요. 음… 딱히… 그런 건 없더라고요. 단, 아주 중요한 사실을 하나 확인했습니다. 임대차보호법 상 전세금은 5%까지만 올릴 수 있다는 점입니다.
제가 사는 집의 전세가 시세는 5% 이상 올랐습니다. 그러니 임대인이 5% 인상을 제시할 가능성이 높고, 저는 5% 인상을 수용하는 게 최선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슷한 집 새로 구하는 것보다 나으니까요. 그러므로 5% 인상은 따스한 조건인데요. 사실 그마저도 마련하려면 골치 아프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결’이면 좋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아마 없습니다. 시장가격은 5% 인상한 보증금보다 더 높고,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안 올릴 이유가 없으니까요.
결론은 났습니다. 유능한 협상가가 되려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던 저는 왠지 김이 샜습니다.
한 줄의 희망

임대인 오 선생님은 만나 뵌 적이 없는 분입니다. 멀리서 사셔서 첫 계약 때도 직접 오시지 못했거든요. 부동산 중개인의 말에 따르면 경기도 남쪽에 사시고, ‘대기업에 다니기 때문에 신용이 좋은 40대 직장인’입니다. 살면서 대화 나눌 일도 거의 없었습니다. 관리사무소의 요청이 있어 카카오톡으로 한 번 대화 나눈 것이 전부였습니다.
어차피 5% 상한이 걸려있는데도 막상 연락하려니 떨렸습니다. 간단한 안부와 계약 만기 문제로 편하실 때 통화하면 좋겠다는 말을 적어 카카오톡으로 보냈습니다.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문득 궁금증이 들어 오 선생님의 카카오톡 프로필을 확인했습니다. 프로필 사진은 본인 사진 대신 카카오프렌즈 캐릭터로 되어있었고, 소개 글은 이렇게 적혀있었습니다.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이걸 읽고 갑자기 가슴이 설렜습니다. 저는 ‘전세금 동결’이라는 대접을 받고 싶었습니다. 어쩌면 오 선생님도 그런 제 마음을 아시지 않을까요? 그리고 말한 대로 행동하는 사람이라면 5% 인상이 아니라 제게 ‘동결’을 제안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언행일치하는 사람 많지 않다고, 소개 글에 뭐라고 써뒀는지도 아마 모를 거라고 스스로 다그쳤지만, 좌심실 아래 서랍에 넣어둔 희망회로에 두근두근 자꾸 불이 들어왔습니다.
집주인 어떻게 설득했어요?

오 선생님과 두 번 통화를 했습니다. 첫 통화에서는 서로 재계약 의향이 있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저는 보증금이 제 형편에 맞으면 더 살고 싶다고 말했고, 오 선생님은 ‘잘은 모르는데 법이 있어서 제가 올리고 싶다고 마음대로 올리지 못한다. 권리가 있으실 테니 알아보라. 부동산과 얘기해 보고 다시 연락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오 선생님은 ‘그대로 재계약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오 선생님은 마치 보증금 동결이 어쩔 수 없는 시장가격이라고 아는 사람 같았습니다. 한 꺼풀의 생색도, 선의가 드러나는 설명도 없었습니다. “그대로 재계약하고 싶다”가 끝입니다. 그러니까 오히려 제 입장에서 이게 배려를 받은 건지, 감사해야 할 일이 아닌 건지 헷갈릴 지경이었습니다. 서로 시간이 맞지 않아 재계약도 따로따로 부동산에 가서 하기로 정하고 대화를 마쳤습니다.
오 선생님이 부동산에 오기 전날 가서 계약서에 사인을 했습니다. 서명하는데 부동산 사장님이 물었습니다. “근데, 어떻게 했어요? 우리가 5%는 올려도 된다고, 다 그렇게 한다고 말했는데 임대인이 그대로 할 거라고 하더라고. 적은 돈 아닌데. 혹시 대학이나 회사 후배예요? 어떻게 설득했어요?”
황금률,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부르는 말입니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내가 받는 대접’이 아닌, ‘남이 내게 받는 대접’뿐입니다. 제가 받고 싶은 대접을 베푼 오 선생님이 받고 싶을 대접은 무엇일까, 고민 끝에 카드를 사서 짧은 편지를 적어 쿠키와 함께 넣었습니다.
“창업한 이래 막막하고 힘든 순간이 많았습니다. 그럴 때 에라 모르겠다 하고 발 뻗고 누울 수 있는 아늑한 집이 있다는 것이 늘 큰 힘이 됐습니다. 소중한 보금자리가 되어준 집을 빌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깨끗이 사용하고, 즐겁게 지내다가 가겠습니다.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언젠가 오 선생님 같은 임대인이 되어보고 싶은
이대호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