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이한 대학원생

최근에 세바시 강연을 듣고왔습니다. 세바시는 5, 6명의 연사를 묶어서 3시간 정도의 강연회를 열고, 그 현장을 촬영해 온라인에 영상으로 올리는데요. 동료 수빈 님이 연사로 서게 됐습니다. 솔직히 강연에 대한 기대 없이 의리 반, 업무로 여기는 마음 반으로 응원하러 갔는데요. 뜻밖에 정말 정말 좋았어요. 특히 좋았던 내용이 뭐였냐면요.

대학원생의 무심한 우정

다녀온 세바시 강연 포스터

어린 시절부터 눈이 안 보였던 서인호 작가님은 수학, 과학을 좋아했습니다. 그런데도 문과를 택했습니다. 이과를 선택하려고 보니, 점자로 된 수학, 과학 교재가 적었습니다. 이과를 고르는 시각장애인이 적기 때문입니다. 최선의 선택은 아니었지만, 문과를 택해 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대학 전공도 정치외교학을 골랐습니다. 여기까지 그의 인생에는 코드가 한 줄도 나오지 않습니다.

대학교에는 ‘필수 교양’ 수업들이 있잖아요? 프로그래밍 언어인 파이썬을 배우는 필수 교양 수업에서 서 작가님은 난감한 상황에 봉착합니다. 볼 수 없어 수업 내용을 따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국어, 영어로 된 교재들은 음성으로 변환하거나 점자로 읽기가 수월합니다. 그런데 컴퓨터 수업은 코드, 그래프로 가득해 읽기도 어렵고, 코드를 작성하는 건 더 막막했습니다.

시각장애인에게는 그런 일이 아주 낯설지 않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 이 수업 그냥 C 학점 받고 넘겨야겠다’고 생각하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서 작가님에게 대학원생 조교가 왜 아무것도 안 하는지 물었습니다. 사정을 설명했습니다. 조교는 다음 시간에 시각장애인이 프로그래밍할 수 있는 방법을 배워와서 서 작가님께 알려주었습니다. 피자를 한 판 사주면서요.

평범하지만 위대한 생각

강연 보러 가는 길에 목격한 나무

서 작가님은 남들보다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늘 고민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할 수 없겠다고 생각했던 컴퓨터 프로그래밍이 오히려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할 수 있게 되자, 다른 친구들보다 더 흥미를 느꼈습니다. 다른 친구들이 머리 아파서 더 이상 고민하고 싶어 하지 않는 문제를 자신은 풀고 싶어 한다는 걸 발견했습니다. 높은 성적으로 그 수업을 마쳤습니다.

서 작가님은 컴퓨터공학을 복수전공으로 선택했습니다. 교양처럼 쉽지는 않았지만, 코드를 음성으로 듣고 손으로 쓰면서 공부해 졸업을 눈앞에 두게 됐습니다. 다음 관문은 취업입니다. 다양한 직무에 지원했습니다. 가장 반겨준 직무는 개발 직무였습니다. 언제, 어떻게 다쳤는지부터 묻는 면접과 달리 개발자 인터뷰는 요구되는 코드를 작성해서 보내주면 끝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서인호 작가님은 캘리포니아의 구글에서 AI 엔지니어로 일합니다.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됐을지도 모릅니다. 파이썬 교양 수업에서 만난 대학원생 조교가 가만히 있는 학생에 대해 아무 의문을 품지 않았거나, 장애학생지원센터에 문의해 보니 지원 제도가 없더라고 답변하고 말았다면 말입니다.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평범하지만 위대한 생각을 안 했다면 말입니다.

‘나도!’라고 생각하셨다면?

사실 가장 인상 깊었던 수빈님 발표

다른 연사들 이야기에도 대학원생 조교와 같은 인물이 등장합니다. 박수빈의 이야기에는 엘리베이터 없는 술집에 같이 가기 위해 가마를 짊어지듯 휠체어를 들어주는 동아리 선후배들이 등장하고, 접근성 스페셜리스트 김세진 님에게는 그가 깜박한 의족을 챙겨다 주는 팀 동료들이 있습니다.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드는 건 1차, 정부의 책임이지만, 또한 이렇게 친구들의 권능입니다.

이 이야기들이 반가웠던 까닭은 ‘우정의 쓸모’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정부는 수학을 좋아하는 청소년 서인호를 위해 점자 수학, 과학 교재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대학원생 조교 우정은 그를 구글 캠퍼스로 보냅니다. 우정은 당장 온 세상을 바꿀 수 없지만, 나의, 내 친구의 삶을 완전히 바꾸는 힘이 있습니다. 공들여 만든 정부도 미처 못 하는 일입니다.

여기까지 읽고 나면, ‘나도 그 조교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도 우정을 발휘하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드시잖아요? 문제는 우정을 발휘할 기회를 당장 찾기가 어렵다는 점인데요.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오는 4월 20일 일요일, 1년에 한 번 뿐인 <2025 크러셔 데이>가 열립니다. 오전에 광화문에서 정복활동도 하고, 오후에는 우정을 주제로 한 패널토크도 열립니다. 여러분의 평범하지만 위대한 선택을 기다릴게요!


제가 너무 재미있게 들은 세바시 강연들 4월 말에 유튜브에 올라온다고 하는데요. 올라오면 한 번 공유해 드릴게요. 갑자기 눈, 비, 바람이 몰아치는데 감기 조심하세요!

여러분의 친구
이대호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