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실험 예능 <고성능 민주주의>
지난 이야기를 요약해보겠습니다. “소멸을 피하려면 이견을 경청하며 토론해 합의점을 다양하게 만들고, 신속하게 최선의 결정을 내리는 ‘고성능 민주주의’ 상태로 가야 한다.” 오늘은 ‘그래서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에 관해 이야기하며 3부작의 막을 내립니다. 저의 제안은 ‘사회실험 예능’입니다.
고성능 민주주의자를 길러내야 한다
고성능 민주주의 상태가 되려면 고성능 민주주의자가 많아져야 합니다. 저번에 민주주의 성능 측정 지표로 (1) 중요 의제 집중도 (2) 합의점 다양성 (3) 결정 적시성을 제시했습니다. 이 지표에 잘 부합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고성능 민주주의사회가 됩니다. 중요한 의제에 집중하고, 다양한 입장에 열려 있는 구성원이 많으면 현명한 제도 변경이 제때 잘 이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전국민이 고성능 민주주의자가 되도록 교육하면 될까요? 그것도 좋겠지만, 한정된 시간을 고려할 때 정당에 집중하면 효과적입니다. 당적을 가진 국민은 1,100만 명, 당비를 납부할 정도로 열성적인 사람은 267만 명입니다. 이들은 정당의 국회의원, 대통령 후보를 정하는 투표에 참여하고, 온·오프라인에서 여러 사안에 의견을 냅니다. 다른 국민에 비해 정치에 영향을 미칩니다.
따라서 정당이 당원들을 고성능 민주주의자로 길러낸다면 정치적 의사결정이 합리적으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중요한 의제에 관심을 갖고, 서로 다른 입장을 경청하며, 합의를 위해 양보할 수 있는 당원들이 정당에서 활발히 활동한다면, 정당을 대표하는 정치인들도 그 변화에 따르게 될 테니까요. 정당 대표와 국회의원은 당원의 투표로 공천이 결정되기 때문에 훈련된 당원들이 합리적 입장을 만들어내면 정치인도 이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걸 어떻게 하냐고요?
사회실험 예능 <고성능 민주주의>
제가 생각한 방법은 평범한 당원들이 단계, 단계를 거쳐 최종에는 당의 입장을 결정하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입니다. <더 커뮤니티: 사상검증구역> 같은 사회실험 예능처럼 말이죠. 지금은 당의 입장을 정할 때 일부 정치인들이 알아서 정하거나, 당원들이 찬성·반대 중에 단순 투표하는 방법밖에 없는데요. 장기간 학습하고, 토론해서 결론을 내는 ‘당원 참여 숙의공론장 방식’을 도입한다면 당원을 고성능 민주주의자로 육성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참여 당원을 1,000명쯤 무작위로 모합니다. 참여자는 3개월 동안 매주 4시간씩 프로그램에 참여합니다. 서로 다른 입장을 대표하는 전문가, 정치인들의 발표도 듣고, 당원끼리 찬반 토론도 합니다. 이때 원래 자기 입장 말고, 다른 입장에서도 토론을 해보는 롤플레이도 해볼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은 리얼리티 예능 프로그램으로 제작해 모든 당원, 국민들이 볼 수 있도록 합니다. 여기서 내린 최종 결론을 정당은 공식 당론으로 채택합니다.
유사 사례를 고려하면 예능 <고성능 민주주의>는 고성능 민주주의자 육성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2017년, 정부가 공론화위원회를 꾸려 신고리 5·6호기 원자력 발전소를 짓는 공사를 계속할지 말지 정한 적이 있는데요. 참여자 중 약 25%는 공론장 시작 전·후를 비교했을 때 입장을 바꾸었고, 최종 결과에 대한 수용 의향은 68% 이상으로 나타났습니다.
“생각이 변할 수 있다는 열린 마음이 가능할까 싶었는데 조금은 다른 얘기가 들렸습니다.”
“나 한사람의 의견과 선택이 나라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것에 책임감을 느꼈고 공론화 과정의 토론방식에 많은 걸 배웠습니다. 다른 토론회에 나가도 이런 자세와 태도를 적용해 볼까 합니다.”
“올 때는 내 의견을 갖지 못했었는데 전문가의 발표와 질의응답, 분임토의 과정을 거치며 자신의 입장을 정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신고리 공론화 백서 중 참여자 의견 일부 (470p)
이렇게 당론을 정하는 건 1년에 최대 두 번이 적정할 것 같습니다. 또, 숙의공론장에 적합한 주제들이 따로 있습니다. 감정적으로 첨예하게 부딪히는 정치적 사안은 숙의로 풀기 어렵기 때문에 피하는 게 낫습니다. 대신 정책, 그중에서도 공동체의 지속가능성에 영향을 미치는 육중한 제도 변경에 관한 내용이 적절할 것 같습니다. 세금, 사회보장제도, 국토계획 같은 것이 있습니다.
정당에도 이익이 된다
사회실험 예능 <고성능 민주주의>가 현실화되려면 이것이 정당에 이익이 되어야 합니다. 취지는 좋은데 이익이 되지 않으면 시작할 수도 없거나, 한 번은 해도 지속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이익이 된다고 주장합니다. 정당의 목표는 ‘권력 획득’입니다. 권력 획득을 위해서는 (1) 내부 결집 (2) 중도 유권자 설득이 중요한데요. 이거 잘하면 (1), (2)에 모두 도움이 됩니다.
내부 결집에 도움이 되는 까닭은 당론을 결정하는 과정에 참여하게 되면, 당에 대한 주인의식을 더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원들의 참여 의지는 높아지는 추세입니다. 주요 당론을 결정할 기회를 열면 반길 분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모신 분들이 고성능 민주주의자로 성장하면, 결속력도 높아지고 다른 정당과 협상을 할 때 타협을 하더라도 지지해 줄 내부 구성원이 많아지게 됩니다.
중도 유권자 포용에도 유리합니다. 모든 정당은 경쟁자가 있습니다. 어떤 사안을 3개월간 찬반을 두루 들어보고 깊이 고민해서 당원들이 결정하는 정당과 지금의 여느 정당이 그러하듯 일부 정치인들이 조용히 결정하는 정당이 경쟁할 때, 평범한 국민은 어떤 정당에 호감을 느낄까요? 과정도, 결과도 전자의 정당을 선호할 것입니다. 합리적으로 도출된 균형감 있는 대안이니까요.
고성능 민주주의 3부작을 요약해보겠습니다.
- 한국이 소멸로 가게 된 원인은 제도 변경의 지연이며, 대안은 ‘고성능 민주주의’다.
- ‘고성능 민주주의’란 중요한 문제에 다들 관심을 갖고, 이견을 경청하며 토론해 합의점을 다양하게 만들고, 제때 결정을 내리는 상태를 말한다.
- 고성능 민주주의 상태로 가는 좋은 방법은 정당이 ‘숙의공론장’으로 주요 당론을 결정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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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운
이대호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