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이런 것까지 해야 하나요?
계단뿌셔클럽 (58)

일하다가 맞닥뜨리는 문제는 대부분 ‘올 것이 왔구나’ 유형인 것 같습니다. 얼마 전 끝난 계단뿌셔클럽의 ‘크러셔 클럽 봄시즌’ 때도 그랬습니다. 냉장실 한구석에 또아리를 튼 시커매진 과일처럼 언젠가는 큰 문제가 되겠구나 하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현실이 되니 얼마나 당황스럽던지요?
크러셔 클럽의 오래된 숙제

‘정복활동’은 문제 해결형 커뮤니티 크러셔 클럽의 핵심 활동입니다. 2인 1조로 식당, 카페 등의 접근성 정보를 모으는 일입니다. 출입구나 엘리베이터 사진을 촬영하고, 경사로 유무 등을 관찰해 기록하는 활동입니다. 그러다 보니 건물 관리인이나 상점 주인들과 마찰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것저것 찍고 기록하는 행위가 수상해 보이고 감시하러 온 듯한 느낌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작년까진 괜찮았는데요. 올해 봄시즌에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왔습니다. 작년까지 ‘핫플’ 위주로 활동을 했습니다. 핫플엔 워낙 사진을 찍는 사람이 많아서 다들 경계심이 없습니다. 올해는 ‘오피스 상권’으로 넘어갔습니다. 오피스 상권에는 건물마다 관리인이 상주하고, 사진을 찍고 있으면 제지하는 경우가 잦았습니다. 유동 인구가 더 적어서 저희가 눈에 더 잘 띄기도 합니다.
‘어디서 나왔냐’, ‘왜 찍는 거냐’, ‘블랙리스트에 올리려는 거냐’, ‘허락 없이 찍지 말아라’는 말을 듣는 일이 점점 늘어났습니다. 게스트 후기에도 이런 경험이 불편했다는 의견이 늘어났습니다. 게스트 활동 만족도도 하락했습니다. 크루들도 이런 상황을 해결해야 한다는 의견을 적극적으로 이야기했습니다. 피하고 싶었던 오래된 숙제를 더 이상 피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솔직히 저도 피하고 싶습니다. 활동 중에 굳은 얼굴의 관리인, 상점 주인에게 계단뿌셔클럽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하는 일이 저조차도 별로 즐겁지가 않습니다. 설명을 듣고 나면 ‘정말 좋은 취지네요!’ 하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분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러나 일단은 경계심 200%로 다가오시기 때문에 즐겁기는커녕 긴장이 될 뿐입니다. 어떤 불편한 대화가 될지 모르니까요.
저도 이런 제가 싫어요! 활동 중에 누가 다가오면 ‘세상에나… 계단뿌셔클럽을 누군가에게 설명할 기회가 생기다니, 나란 사람 정말 행운아잖아?’ 하는 생각이 들며 미소가 번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 되는 걸 어쩌겠어요? 공동대표인 저도 이런데 다른 동료 크루들, 심지어 오늘 처음 활동하는 게스트는 당연히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피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현장의 갈등에 대응하는 것은 그 자체로 효과적인 문제 해결 행위이거든요. 이동약자와 그 친구들이 겪는 문제를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분들께 설명할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더 많은 사람이 알게 되면 사회적 공감대가 커져서 문제 해결이 쉬워집니다. 그러므로 설명하고 양해를 구하는 건 부담스럽지만 아주 의미 있습니다. 많은 사람의 생각이 바뀌면 큰 문제도 해결될 수 있으니까요.
돌파

지난 봄 크러셔 클럽은 이 문제를 ‘돌파’하는 방향으로 유기적으로 움직였습니다. 먼저 정복활동을 운영하는 크루들이 현장에서 경험한 문제 상황에 대한 의견들을 냈습니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아이디어들도 여러 가지 나왔습니다. 대표적인 것들이 갈등 상황 대응 매뉴얼 만들기,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리플렛 배부하기, 대응 방법 연습 세션 만들기입니다.
대응 매뉴얼 만들기는 빠르게 실행됐습니다. 크러셔 클럽의 운영 매뉴얼을 만드는 조직인 가이드유닛 크루들이 갈등 상황 대처 매뉴얼을 만들어 배포했고, 많은 크루들이 이 매뉴얼을 사용해 돌발 상황에 좀 더 잘 대응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완벽히 해결된 것은 아니라서 앞으로도 시스템 개선을 위한 노력과 적극적인 마음가짐을 갖기 위한 노력을 고민해야 합니다.
사실 ‘현장 갈등’은 ‘돌파’할 용기를 못 내고 주저했던 문제입니다. 동료들에게 돌파해야 한다고 말하면 ‘내가 왜 이런 것까지 해야 하냐?’며 싫어하면 어떡하나 겁이 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난 시즌의 변화가 놀랍고 부끄러웠습니다. 설득하지 않았는데 이미 각오하고 해결해 나가는 모습이 꿈꿔본 적도 없는 선물 같았고, 한편 제가 서랍 깊숙이 박아 둔 오답노트를 친구들이 대신 푸는 모습을 목격한 것 같았습니다.
쩝, 뭘 잘 한다는게 참 어렵네요!
지난 편지에 제가 ‘ㅋ’ 한 글자라도 댓글로 남겨 주십사 간청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제 예상보다 훨씬 많은 분이 등장해 댓글을 남겨 주셨어요. 고성능 민주주의 3부작에 대한 의견이 궁금했던 거였는데, 정말로 ‘ㅋ’만 남겨 주신 분이 대부분이어서 얼마나 감사하고 감동했는지 모릅니다ㅋ
모든 것이 감사한 여러분의 친구
이대호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