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바스에 빠진 코로나 백신 문제
이토록 아름다운 정치 (4)

이토록 아름다운 정치 (4) : 놀라지마세요. 가끔 정치가 제 몫을 해내고, 세상을 더 낫게 만들기도 합니다. 세상을 더 낫게 만든 정치적 사건과 그 사건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정치적 변화를 만드는 동력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관심’이고 둘째는 ‘정치적 이익’입니다. 힘있는 세력이 어떤 문제에 ‘관심’도 있고 그것을 해냈을 때 ‘정치적 이익’도 얻을 수 있는 경우, 빠르게 해결됩니다. 반대로 ‘관심’과 ‘정치적 이익’을 모두 가진 정치인이 아무도 없으면 문제는 틈에 빠져버립니다. 이 틈을 ‘정치적 크레바스(빙하 사이에 생긴 깊은 틈)’라고 부르겠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수많은 코로나 백신 부작용 피해자들이 낡은 제도 탓에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 하고 크레바스에 갇혔던 이야기’입니다.
크레바스에 빠진 백신 피해자들

더불어민주당은 사회적 참사 문제에 상대적으로 ‘관심’이 큽니다. 그리고 ‘정치적 이익’까지 연결되면 열심히 추진합니다. 실제로 민주당은 세월호 참사 특별법, 이태원 참사 특별법을 열심히 밀어붙여 처리했습니다. 참사 피해자를 보호하는 일에 진정성이 있고, 두 사건 모두 상대 정당이 국정을 운영할 때 일어났기 때문에 상대편의 과실이 부각되는 정치적 이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 백신 부작용 문제는 달랐습니다. 민주당이 여당이었던 문재인정부 때 일어났습니다. 게다가 ‘코로나 방역 성공’은 문재인정부의 큰 업적 중 하나입니다. 민주당 정치인은 이 문제에 관심이 있더라도 문제제기하기 어렵습니다. 자기 진영을 비판하고, 자기 진영의 과오를 드러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국회(2020-2024)에서 코로나 백신 피해자 보상을 확대하기 위해 발의된 특별법안 중, 민주당 의원이 대표발의한 법안은 1개도 없습니다.
상대 정당인 국민의힘에는 정치적 이익이 되니까 그들이 열심히 하면 되지 않냐고요? 맞습니다. 그러나 국민의힘이 관심 있는 주제는 다른 것들입니다. 사회적 참사, 재난 문제에 대해선 관심이 별로 없습니다. 코로나 백신 피해자 보호는 무려 윤석열 정부 1호 공약이었지만, 윤석열정부는 문제해결을 위해 특별한 노력을 하지 않았습니다. 백신 피해 문제를 1호 공약으로 삼은 건, 상대편의 잘못을 부각시키려는 의도였을뿐 진정성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는 방증입니다.
크레바스 틈으로 내려간 국회의원

2022년 무렵부터 광화문에 코로나 백신 피해자 단체가 설치한 농성장이 있었습니다. 정치적 크레바스에 빠져 여당도, 야당도 관심 갖지 않는 쓸쓸한 농성장을 보며 정치의 몰양심에 씁쓸함을 느꼈습니다. 코로나 대응 성공을 자랑하면서 책임은 외면하는 (당시) 야당도, 정략적으로 이용할뿐 정권을 교체하고도 1호 공약을 지키지 않는 (당시) 여당에도 짜증이 났습니다.
그런데 크레바스에 로프를 타고 내려간 정치인이 있었습니다. 로프를 타고 크레바스로 내려간 첫 번째 정치인은 김미애 국민의힘 의원입니다. 변호사 출신 김미애 의원은 2021년부터 이 문제를 끈질기게 붙잡고 팠습니다. 국회가 정부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국정감사때마다 백신 피해자들이 피해 인정을 너무 못 받는 문제를 매년 제기했습니다. 특별법안을 대표 발의하기도 했습니다.
집권여당 의원이 끈질기게 노력하면 금방 해결될 것 같지만, 아닙니다. 민주당 쪽에서도 크레바스 아래로 내려가는 정치인이 필요했습니다. 뉴스에는 ‘다수당이 일방적으로 처리한 뒤 거부권 행사’ 소식이 주로 나오지만, 일부 쟁점 법안만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법은 여야, 정부까지 합의해야 통과가 되는데요. 그러려면 김미애 의원의 상대가 되어 조율하고 합의할 사람이 민주당에서도 나와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자기 편의 약점을 말하는 용기가 필요한 난감한 배역이었습니다.
여기까지가 2024년 총선이 치러지기 전, 21대 국회의 상황입니다.
크레바스로 내려간 두 번째 정치인

서울대 의대 교수였던 김윤은 2023년 정부의 코로나 백신 피해자 관련 정책을 비판하는 칼럼을 씁니다. 질병관리청은 백신 접종 사망자 약 1,000명 중 2%를 ‘인과성이 있다’, 20%를 ‘인과성이 없다’, 78%를 ‘불분명하다’고 분류했습니다. 프랑스나 독일처럼 ‘백신 접종 이상 반응을 다른 이유로 설명할 수 없고, 백신 접종에 따른 것으로도 볼 여지가 있으면 ‘불분명’이 아니라 피해자로 인정해야’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리고 얼마 뒤 김윤은 2024년 총선에서 당선되어 민주당 국회의원이 됩니다. 그리고 출근 5일만에 코로나 백신 피해자 인정 기준을 바꾸겠다는 기자회견을 엽니다. 외부에서 영입된 초선 의원이 크레바스 아래로 내려가 ‘자기 편의 문제’를 건드리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김윤 의원은 약속대로 작년 11월 백신 피해 구제 특별법안을 발의하며 김미애 의원의 상대배역을 맡습니다.
올해 1월 결정적 순간이 있었습니다. 1월은 대통령 탄핵 심판이 TV로 중계되며 여야가 극한으로 갈라져있는 것 같은 시기였습니다. 그때 국회에서는 김미애 의원 법안, 김윤 의원 법안을 조율하며 쟁점을 정리하는 토론이 성실하게 이뤄졌습니다. 1월 22일, 회의 진행을 맡은 김미애 의원이 ‘시간이 늦었으니 다음에 논의하자’는 의원을 달래가며 논의를 이어나갔고, 마침내 여당, 야당, 정부가 합의를 이루게 됩니다. 마침내 특별법이 4월 2일 본회의를 통과합니다.
때로는 정치인들이 자기 이익 외에는 모르는 존재 같습니다. 그래서 정치적 크레바스에 빠지면 해결 될 가능성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따금 크레바스 아래로 내려가는 정치인들이 있습니다. 물어보지 않아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아마, 우리가 이익이 되는 일만 하고 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가끔 누군가 꼭 해야 할 일을 해보고 싶은 것이 아닐까 추측해볼 뿐입니다.
관련 소식을 모니터링하던 저로서는 1월 그 난리통에 이 법안의 합의가 이뤄졌다는 것이 상당히 흥미로웠습니다. 여야가 갈라져 아무 일도 안 하는 것 같아도, 누군가 필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희망적인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희망을 짜내고 있는 건가 싶기도 한
이대호 드림.
*이토록 아름다운 정치 지난 편이 궁금하신 분들은 여기에서 모아 보실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