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가 좋은데 뭔가 찝찝할 때
큰 프로젝트를 만들어가는 일은 반찬이 많은 밥상을 차리는 일과 비슷합니다. 다양한 반찬을 각각 맛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또 전체가 조화로워야 합니다. 그래야 성공입니다. 따라서 성공을 위해선 해본 요리로 프로젝트를 꾸미는 것이 안전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럴 때 없으세요? 나도 먹어본 적 없는 실험적인 메뉴를 꼭 하나 넣고 싶다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을 때요.
오늘 이야기는 지난 6월 철원에서 1,500명의 마음을 사로잡은 ‘우정팔찌’ 제작기입니다.
우정원정대와 우정팔찌
우정원정대는 다양한 장애 유형의 관객들과 DMZ 피스트레인 페스티벌 2026을 한껏 즐기고 온 프로젝트였습니다. 피스트레인은 힙스터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정말 재밌는 축제입니다. 저도 작년에 처음 가봤는데요. 선곡도 좋고, 음식도 맛있고, 무엇보다 초면인데도 서로 격의 없이 어울리는 우정 넘치는 문화가 참 특별한 곳입니다. 그런데 접근성이 좋지는 않습니다.
이 좋은 걸 모두가 누렸으면 하는 마음에 조금다른 주식회사와 의기투합해 풍성한 밥상을 차렸습니다. 프로젝트의 핵심 구성 요소는 (1) 현장에 접근성 지원 부스 설치해서 필요한 물품 대여하기 (2) 이동 지원이 필요할 때 함께 이동하는 스태프 꾸리기 (3) 안전하고 편하게 무대를 볼 수 있는 컴포터블존 설치하기 (4) 휠체어로 탈 수 있는 특장버스 운행하기였습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구색이 맞는 한 상입니다. 그런데, 듣도 보도 못한 실험적인 메뉴를 하나 더 넣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만들어 본 적도, 먹어본 적도 없으므로 나도 내가 뭘 하자는 건지 정확히 뭐라고 설명을 못 하겠지만, ‘아, 여기 그게 딱 들어가면 좋을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잖아요? 그것은 괴식이 될지, 정갈한 한 상의 대미를 장식할 ‘킥’이 될지 알 수 없었던 (5) 우정팔찌라는 기획이었습니다.
겹겹이 사상누각
우정팔찌의 실물입니다. 부스에 오는 관객들에게 저 형광 팔찌를 채우고, 심리 테스트 형태의 간단한 임무 유형 테스트를 권유합니다. 몇 가지 질문에 답하면 ‘나만의 임무’를 받게 됩니다. 임무는 모두 장애인은 물론 어린이, 고령자 관객을 환대하고, 함께 축제를 즐기는 방법들입니다. 이렇게 은근슬쩍 임명된 대원들이 우정팔찌를 차고 축제 현장 곳곳에 배치되어 있으면, 걱정과 부담을 안고 피스트레인에 온 장애인 관객들이 더 편하고 즐겁게 놀 수 있을 거란 기획입니다.
위험천만한 기획이었습니다. 가설을 이중으로 돌파해야 했거든요. 성공하려면 두 개의 가설이 참이 되어야 합니다. 첫 번째 가설은 우리가 준비한 1,500개의 우정팔찌와 임무 카드를 1,500명의 관객들이 가져갈 거란 것입니다. ‘이런 거 왜 해?’ 하고 안 팔리면 땡입니다. 둘째, 장애인 관객들 눈에 팔찌를 찬 사람들이 보이고, 그 경험으로 인해 더 편안하고 즐거울 것이다. 대기권 돌파도 해본 적 없는데, 우주선을 대기권 밖으로 보내 달 착륙까지 연달아 해내야 하는 느낌이랄까요?
가장 끔찍한 상상은 가설이 1단계만 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팔찌 디자인, 임무 유형 테스트를 동료들이 멋지게 만들어가는 걸 보다 보니 ‘잘하면 1,500명 꼬실 수 있겠는걸?’ 하는 생각은 들었습니다. 근데, 1,500명이 팔찌 다 차고 있는데 아무 효과가 없다면요? 보기엔 아름답지만 간이 하나도 안 맞아 먹을 수 없는 음식입니다. ‘보여주기식’으로 낭비만 한 셈이 됩니다.
‘보여주기식이 되고 망했다’니, 와, 정말 와들와들 떨리게 너무 겁나는 일이잖아요?
이중가설 돌파, 그러나 찝찝한 점
천만다행, 이중가설을 돌파했습니다. 우정팔찌는 기대 이상의 인기를 누려 해 지기도 전에 물량이 동이 나 버렸고요. 장애인 관객 대원들의 후기에는 우정팔찌를 차고 곳곳에 포진된 현장 대원들의 존재가 도움이 되고 좋았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또, 느닷없는 임무를 받은 현장 대원의 약 80%가 ‘장애인 관객과 축제를 함께 즐겼다’고 설문에 응답한 점도 기대 이상의 성취였습니다. 잘 되어서 너무 좋았습니다. 우정팔찌 망했으면 저 무릎 꿇었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팔찌를 나눠줄 때 ‘장애인 관객들을 환대하는 포용적 축제를 만드는 일에 동참해 달라’고 설명했던 것이 찝찝합니다. ‘환대’라는 말은 주인과 손님을 나눕니다. 장애인 관객을 환대받을 손님, 비장애인 관객을 환대의 책임을 지는 주인의 자리에 배치합니다. 다정한 단어이지만, 이 맥락에서 환대라는 말을 고르는 순간 '현재는 주인의 자리에 장애인 관객이 아직 없음'을 선언합니다.
캠페인의 대상인 다수의 비장애인 관객에게 ‘환대’라는 말은 쉽고 유용합니다. ‘환대’라는 말에 캠페인 취지를 다들 찰떡같이 이해합니다. 그러나, 페스티벌에 이미 주인의 마음으로 가 있었던 장애인 관객들은 갑자기 ‘환대의 대상’이 되는 상황을 어떻게 느꼈을까요? ‘취지는 알겠으나, 좀, 그렇네’ 하고 생각하는 분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장애, 비장애가 아니라 ‘처음인 사람’(손님), ‘와본 사람’(주인)을 균열선으로 두고 캠페인을 기획했다면 어땠을까요? 위와 같은 불편함은 없어집니다. 그러나 설명이 모호합니다. 1,500명을 설득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장애인 접근성을 보장해야 할 필요성을 알리기도 더 어려웠을 것입니다. 찝노답, 찝찝한데, 정답이 없는 문제입니다.
최근 재밌게 본 연극 프로그램북에서 이런 문장을 읽었습니다. “우리의 시도가 완벽할 수 없음을 안다. 어딘가 엉성하거나 누군가 불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 질문하고 재차 부딪치는 이 환대의 시도들이 유효하다는 것 또한 안다.”
찝노답 문제를 푸는 것의 괴로움은 실수 없이 완벽해야 할 것 같은 영역에서 반드시 일정하게 실패한다는 데 있습니다. 끝나고 보면 누군가 불편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시도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정원정대 정말로 좋았기 때문입니다.
모두 더위 조심하세요!
당신의 친구 이대호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