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수상했던 사람

어제 계뿌클 ‘경로잔치’를 열었습니다. 계단뿌셔클럽에서 운영진으로 긴 시간 활동한 크루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행사였습니다. 고인물들이 대놓고 ‘라떼 토크’ 한바탕 할 수 있게 꾸민 행사였는데요. 그중에서도 박 선생님이 들려준 라떼 토크가 참 특별했습니다. 왜냐하면 박 선생님은 어느 누구보다 오래된, 태초의 크루이기 때문입니다.

태초의 크루, 동대문의 아들

놀랍게도 남아있는 그 날의 사진

박 선생님을 처음 만난 건 2021년의 초겨울이었습니다. 계단뿌셔클럽이 막 베타 서비스를 출시하고, 성남시 내에서 동네 사람들을 모아 어설프게 정복활동을 시작했던 무렵입니다. 어느 날 ‘동대문의 아들’이라는 특이한 닉네임의 신청자가 왔습니다. 대학생인데 우연히 제가 쓴 글을 인터넷에서 보고 궁금해서 동대문에서 멀고 먼 성남의 야탑역까지 오셨다는 거예요.

사실 처음엔 좀 수상하다고 생각(‘왜 동대문에서 여기까지…?!’)했는데, 알고보니 참 좋은 친구였습니다. 빈 자리가 많았던 때, 먼 길 마다하지 않고 활동에 자주 와주셨습니다. 왜 여기까지 오셨는지 물었을 때의 대답이 아직 기억에 남아요. ‘문제해결이라는 말이 좋은 것 같아요. 변화가 생기기를 마냥 기다리지 않고, 직접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어요.’

마음에 든다는 말 정말이었나봐요. 5년 동안 한 시즌도 건너뛰지 않고 함께 했습니다. 호기심 많은 대학생에서 직장인이 되고도, 주말 내내 출근하기 일쑤인 빡센 직장생활 속에서도요. 여러 시즌 더 큰 책임을 져야하는 리더크루를 맡아주었고, 꽤 지루했을 텐데 장시간의 기획 회의, 회고 회의 자리를 빠짐없이 채워주었습니다. 지금 시스템을 손수 함께 만든 개국 공신들 중 한 분입니다.

5년은 꽤 긴 시간입니다. 그래서 그가 한 활약도, 기여도, 제가 받은 도움도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그중에서 박 선생님에게 받은 가장 기억에 남는 도움 두 가지를 꼽아봅니다.

선을 넘도록 부추기기

옛날 옛적에, 귀여웠다 다들!

크러셔 클럽은 자발적인 활동입니다. 따라서 크루의 역할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크루 공동체의 합의가 꼭 필요합니다. 프론트(수빈 님, 저를 비롯한 운영팀)가 한 걸음 더 나가자고 제안할 수 있지만 동료들이 수용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 없습니다. 그리고 이미 여러 부담이 있기 때문에, 단순히 당위가 있다고 해서 활동의 양과 난이도를 늘리고 높이는 것이 쉽게 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문제해결 하려면 선을 계속 넘어야 합니다. 2번의 활동이 5번이 될 때, 저 혼자 맡았던 현장 운영의 리더십이 크루들로 넘어갈 때, 더 많은 활동이 열려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니까요. 이런 일들을 설득할 때 박 선생님의 도움이 아주 컸습니다. 왜냐하면, 부담되는 제안을 할 때마다 크루들 속의 박 선생님이 “까짓거 한 번 해보시죠”라고 능청스럽게 이야기해주었기 때문입니다.

다들 고민이 깊어져 정적이 흐를 때, “우리 이제 저만큼 가볼 때가 된 것 같기도 해요”같은 박 선생님의 말에는 큰 힘이 있었습니다. 제가 같은 말을 했다면 크루들은 ‘이대호야 당연히 저렇게 말하겠지’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크루의 의견이기 때문에 다들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됩니다. 미리 부탁한 적이 없는데, 부탁했었나 싶은 말들을 해준 덕분에 수많은 선을 매끄럽게 넘어올 수 있었습니다.

타인에 대한 연민

이런 기획 회의 진짜 많이 했는데!

박 선생님은 장점이 많은 사람입니다. 웃기고, 사진도 잘 찍고, 주변 사람들의 고민을 잘 알아채는 섬세함을 지녔고, 그러면서도 컨설턴트 같은 서늘한 분석에도 능합니다. 그중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장점은 연민입니다. 연민이 많아 주변 사람이 힘들어 하면 참 다정하게 잘 챙기는데요. 저 역시도 심란하고 괴로울 때 그가 보내준 격려와 위로에서 용기를 얻곤 했습니다.

가끔 제가 여기에 답 안 나오는 고민과 투정을 한 가득 적어서 보내기도 하잖아요? 박 선생님은 가끔 메일로 답장을 보내줍니다. 언젠가 그가 보내준, 두고두고 꺼내 본 답장의 한 단락입니다.

"자신이 제공하려는 것에 비해 세상이 너무나 어리석고 비열하게 보일지라도 이에 좌절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 어떤 상황에 대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외칠 수 있는 사람" ...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온전히 그럴 수 없다고도 생각하고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대신 책임져주지 않는(오히려 저지른 놈들은 도망가기 바쁜) 우리의 현실 앞에서,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부족하지만 책임져보겠다고 몸을 던지는 대호님이 좋았습니다. 대호님의 그런 몸부림에 마음이 동했습니다. 그래서 응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메일을 읽고 ‘엥…! 나는 몸을 던지는 사람은 못 되는데… 나도 도망가고 싶은데…’, 과분한 격려이고 기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는 사람같아 마음 쓰였구나, 연민의 마음으로 오래 함께 해주고 있었구나 생각하니 어쩐지 이 모험에서 외로울 일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까짓거 친구의 기대에 걸맞는 사람이 한 번 되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오늘로 이끌었음을 돌아보니 깨닫습니다.


이제는 만나면 놀릴 생각 뿐이지만, 사실은 여전히 깊은 존경의 마음을 갖고 있답니다. 귀하의 한결같은 우정에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당신의 친구
이대호 드림.

P.S. 지난 호에 예고한 대로 정부 예산안 발표됐습니다. 장애인 권리보장 예산 얼마나 반영됐는지, 박홍근 장관이 문제를 해결했는지 다음 주에 따져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