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공불락 무대의 함락

우정원정대 (2)

난공불락 무대의 함락

이번에 우정원정대로 다녀온 부산국제록페스티벌(이하 ‘부락’)은 유료 관객만 4만 명이 넘는 엄청 큰 음악 페스티벌입니다. 여의도 1.5배 크기의 광활한 땅에 무대가 5개 서는데, 가장 큰 무대가 ‘삼락 스테이지’, 두 번째 무대가 ‘그린 스테이지’(이하 ‘그린’)입니다. 오늘 주인공은 ‘그린’입니다. 재밌는 공연 대부분이 열리는 이 무대를 휠체어로는 사실상 갈 수 없었거든요. 난공불락이었습니다. 우정원정대가 가기 전까지는 말이죠.

갈 수 없는 땅, 그린 스테이지

그린 스테이지에 설치됐던 임시 다리 (2025)

‘그린’ 주변은 참 아름답습니다. 실개천이 흐르고, 잘 보존된 늪지대가 둘러싸고 있습니다. 왜 이름이 그린 스테이지인지 납득이 갑니다. 환경이 이렇다 보니 부락 운영팀은 하천과 늪지대 위로 철제 임시 다리를 두 개 설치했습니다. 문제는 이 다리에 오르고 내리려면 계단을 밟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휠체어를 사용하는 관객들에게는 보고 싶은 공연이 있어도 갈 수 없는 환경입니다.

이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건 작년 부락에 다녀온 친구들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린’은 아마 못 갈 테니 좀 알아보는 게 좋을 거라고요.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처음에는 중요하다는 생각을 못 했습니다. 우정원정대를 준비하는 과정이 쉽지 않아서 거기까지 고민이 닿지도 못했거든요. ‘아쉽지만 5개의 무대 중에 하나 정도 못 보는 건 어쩔 수 없지 않을까?’ 하고 고민을 더 안 했습니다.

정신을 차린 건 사전 답사 때였습니다. 가서 보니 ‘그린’이 세워질 공간이 너무나도 광활한 것이 아니겠어요? 뒤늦게 작년 ‘그린’에 섰던 아티스트 라인업을 찾아봤습니다. CNBLUE, 넬, MIKA, 이승윤 등, ‘아뿔싸, 여기는 서브 무대가 아니라 사실상 메인 무대구나. ‘그린’ 무대들을 못 보는 부락에 가는 건 참치김밥을 안 파는 김밥집에 가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날리는 카드면 어떡하지?

우정원정대 대원 일동

우정원정대는 페스티벌 운영팀의 협력이 있어야만 가능한 프로젝트입니다. 감사하게도 부락 운영팀에서 함께해 주셔서 이번 우정원정대 2도 가능했습니다. 긴밀하게 서로 의논하면서 일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린’을 휠체어로도 갈 수 있도록 하는 일도 부락 운영팀에 상의, 제안해 볼 수는 있었는데요. 문제는 협의할 사안이 ‘그린’만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말이 ‘협의’지 사실 부락 운영팀에서 우리의 제안을 들어주셔야 하는 안건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우리는 장애인 관객 편의를 위한 것을 하나라도 더 하고 싶고, 부락은 한정된 자원 내에서 무얼 할지, 말지 판단하는 입장이니까요. 그럴 때는 쫀쫀한 전략을 짜야 합니다. 안건의 우선순위를 정교하게 배열하고, 그중에 무엇을 포기할지 냉철하게 판단해야 성과를 극대화할 수 있습니다.

전략을 짜면서 저의 고민은 ‘그린’ 문제가 정말 중요한데 ‘어차피 안 되는 카드가 아닌가? 차라리 다른 될 만한 걸 요청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든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제안은 ‘계단 달린 다리가 아니라 경사로 달린 다리를 짓자’는 것이었습니다. 근데 당장 페스티벌이 한 달도 안 남은 시점이었고, 서류 고치는 것도 아니고 시설 설계를 바꾸기 쉽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분명히 어떤 카드는 살고, 어떤 카드는 죽습니다. 몇 번 남지 않은 턴, ‘그린’ 카드를 내는 것이 정의롭지만 실리를 잃는 무책임한 결정이 되지는 않을까? 참 입맛 떨어지는 고민입니다.

안 풀릴 때는 하소연

정말 많은 사람들과 같이 놀다 왔답니다

고민이 깊을 때 주변 동료, 친구들에게 의견을 묻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물어봤습니다.

  • 의견 1: “장애인 관객이 돈 내고 표를 샀는데 아예 갈 수 없는 스테이지가 있는 것 자체가 이상해.”
  • 의견 2: “어쩌면 우정원정대 부스 잘 하는 것보다 부락에 더이상 누군가 못 가는 스테이지가 없어지는 것이 더 중요한 거 아닐까?”
  • 의견 3: “내가 좋아하는 아티스트 무대가 그린일 것 같은데 나 못 가면 진짜 드러눕울 거야. 개통 못 하면 내 휠체어 들고, 업고라도 갈 각오해.”
  • 의견 4:“작년에 보니까 비장애인들도 계단에 많이 걸리던데 경사로가 모두에게 낫다고 설득해보면 어떨까?”

대부분 하소연으로 흐르긴 했지만, 큰 도움이 됐습니다. 대화 과정에서 포기하지 않을 이유와 설득 논리를 얻었거든요. 그래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했냐고요? 비밀입니다. 그냥, 전보다 좀 더 뻔뻔하고 비굴해질 수 있었다고만 해두겠습니다. 마음을 다르게 먹고 나니, 쥐고 있는 카드가 더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결과 난공불락의 무대, 그린 스테이지가 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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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 스테이지로 넘어가는 우정원정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이었습니다. 제가 그려서 보낸 경사로 다리 상상도가 영 못미더우셨나 봅니다. 부락 운영팀은 아예 늪과 하천을 흙으로 메워 평지로 만들었습니다. 아래는 이동약자와 그 친구들이 도도하게 그린 스테이지로 들어서는 모습입니다. 뭉클했어요. 휠체어를 탄다는 이유로 갈 수 없는 무대는 국내 최대 음악 페스티벌 부락에 더 이상 없습니다.


부산축제조직위원회 사랑합니다.
이번에는 거짓이 아니라고요.

이대호 드림.